[로드무비] 혼란의 깊은 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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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혼란의 깊은 아가리

2022. 10. 21 10:56 작성2022. 10. 21 23: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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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de movie]

남한산성, 2017 황동혁 감독

최명길과 김상헌은 목숨을 걸고 논쟁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 CJ엔터테인먼트

"17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명(明)과 대립하던 여진은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조선에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강요했다. 조선은 민족의 자존과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청에 저항했다. 1636년 12월 14일,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이닥쳤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이런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야기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연기)과 항전을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식 연기)은, 인조를 가운데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조선은 47일 만에 청에 항복한다.


산성 밖으로 나가는 최명길에게 김상헌은 묻는다. "주상께서는 성을 나가는 대가로 칸에게서 무엇을 얻으셨소?" 최명길이 답한다. "주상 전하를 폐하거나 심양으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약조입니다." 또 묻는다. "이판께서는 무엇을 얻으셨소?" "이 성에 남은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을 해하지 않겠다는 약조입니다." 그러자 김상헌이 말한다. "이판께서 뜻하시던 바를 다 해내셨구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 그나마 임금과 왕조를 지킨 불행 중 다행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거듭 적진에 들어가 화친을 시도한 최명길 덕인지, 죽음을 불사하는 의지를 적에게 각인시킨 김상헌 공인지 모른다. 궁벽한 산성에 갇힌 두 사람은 오로지 말로써, 나라에 닥친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시비해야 했다. 이들의 언어는 조선팔도의 물리적인 힘과 지나온 시간을 그러모은 것이다. 고도로 이념화한 이 논쟁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일이 헌법재판이다. 국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는지, 정부의 공권력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살핀다. 하지만 법원의 재판만은 헌법재판소(헌재)가 감시하지 못한다. 외국에는 법원의 판결을 헌법재판 하는 독일 같은 나라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법원의 재판을 제외한 이유는 1988년 헌법재판소법을 만든 의회의 선택, 즉 정치적 결단이다. 그런데 헌재가 개소해 헌법재판을 해보니 인권침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지점이 국회의 법률 제정 단계인지, 법원의 법률 해석 단계인지 모호했다.


춥고 눈이 많이 내린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이 논쟁한 것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질 것인지였다. 그게 그때 조선이었다. / CJ엔터테인먼트
춥고 눈이 많이 내린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이 논쟁한 것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질 것인지였다. 그게 그때 조선이었다. / CJ엔터테인먼트


이런 문제를 맞아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시작했다. 1980년대 법원은 사죄광고 명령을 자주 내렸다. 근거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하여는 법원은⋯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라는 민법 제764조다. '적당한 처분'으로 법원이 사죄광고를 만들었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1991년 헌재는 "민법 제764조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에 사죄광고를 포함시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라고 결정했다. 법원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로는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가 법률을 통제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재판을 통제하고 있다"라고 반발했다.


법률을 통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조문을 심판하는 일이라고 법원은 말한다. 이에 헌재는 조문(條文)이 아니라 규범(規範)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법원 주장이 맞는다면 '제1호 내지 제4호'라는 조문에 제2호가 없는데도, "제2호는 헌법에 위반된다"라는 헌재 결정(93헌가1)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하지만 법원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헌법재판에 공백이 생겼다. 의회 단계부터 위헌인 법률을 법원이 적용할 때는 헌재가 위헌 무효로 만들 수 있지만, 의회 단계에서는 합헌이던 법률이 법원 적용을 거쳐 위헌이 되면 방법이 없었다.


가령 법원은 노동자의 파업을 형법 제314조 제1항 업무방해죄로 처벌한다. 헌법 제33조 제1항이 보장하는 파업의 본질적 속성은 업무방해인데도 이를 처벌했다. 의회 단계에서는 합헌이던 업무방해죄가 법원의 적용을 거쳐 위헌이 된 셈이다. 헌재는 이 문제에 "쟁의행위는 고용주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라면서도 "법원이 쟁의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2010년 적고 말아야 했다. 이 밖에도 위헌이 의심되는 판결이 계속됐다. 과거 군사정부는 경찰과 군인을 시켜 시민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런 국가범죄가 드러난 계기는 2005년 제정된 과거사정리법이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과거사위원회가 2006~2009년 조사를 벌여 진실을 밝혔다. 피해자들은 2009~2011년 법원에 형사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았다.


이때부터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상대방, 즉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했다. 손해를 배상하라고 했다. 오래된 일들이라 소멸시효가 문제였다. 세계적으로 국가범죄나 인권범죄에 대해서는 소멸시효를 없애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도 처음에는 과거사 사건의 소멸시효를 배제했다.


그러다가 2013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민법이 정한 단기 소멸시효 3년을 적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때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석 달 뒤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해가 어려운 이론을 구성해 6개월로 줄였다. 군사정부 피해자들이 줄줄이 패소했다. 소멸시효를 이유로 손해배상이 거부된 사람들이 헌법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소멸시효를 과거사 사건에는 적용하지 말라고 2018년 결정했다. 이날 전에 없던 새로운 주문(主文)을 선보였다. '적용되는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가 등장했다. "민법 소멸시효 조항 중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사건에 적용되는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 이렇게 문장을 바꾸며 '한정위헌'이 아니라 '양적 일부위헌'이라고 했다.


헌재가 주문형식에 이름을 뭐라 붙여도 법원으로서는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헌재 결정의 반대의견 재판관 3명부터 이건 한정위헌이라고 했다. 이들은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법률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원의 역할이다.⋯청구인들의 이 사건 심판청구는 모두 부적법하므로 이를 각하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법원이 기존 태도를 고수한다면 헌재 결정을 거부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해 파면된 이후 법원의 소멸시효 판결이 새삼 비난받고 있었다. 여론과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도 대법원의 과거사 소멸시효 판결이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이듬해인 2019년 대법원이 헌재 결정을 받아들였다. 대법관 4명이 참여하는 소부 결정이었고, 주심은 민유숙 대법관이었다. 내용이 불분명했다. 언뜻 헌재의 결정을 해석에 대한 관여가 아닌 법률에 대한 위헌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이 판결을 법원 안팎에서 모두 불만스러워했다. 판사들은 "이렇게 되면 앞으로 법원 판단을 헌재가 일일이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한정위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난 30년 입장이 설명도 없이 뒤집히는 셈"이라고 했다. 외부에서도 석연치 않다고 한다. "대법원이 견해를 바꿨는지 분명하지 않다. 언제든 한정위헌은 대법원 해석권 간섭이라며 무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헌재 결정을 입맛에 따라 고르겠다는 얘기가 된다"고 지적한다.


겁에 질린 조선 병졸은 청나라 기병들이 사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사격을 시작해 탄환을 모두 허공에 날린다. 그렇게 해서 군사 300명이 전멸한다. / CJ엔터테인먼트
겁에 질린 조선 병졸은 청나라 기병들이 사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사격을 시작해 탄환을 모두 허공에 날린다. 그렇게 해서 군사 300명이 전멸한다. / CJ엔터테인먼트


헌재의 과거사 소멸시효 결정도 결론이 정의롭다는 점과 별개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결정의 주문은 소멸시효가 과거사정리법이 규정한 사건에 적용되면 위헌이란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정리법 조항들은 조사 개시를 위한 조항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한 조사야 일단 뭐라도 하면 좋으니 테두리를 애매하게 했다. 가령 진실규명 범위로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발생한⋯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혹사건'이라고 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조항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배제하라고 하니 민법 원칙인 소멸시효 자체가 무의미하게 됐다. 권위주의 시대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고, 행위자가 국가로 특정돼 있지 않아 개인도 대상이 된다. 그래서 개인 간 재산권 분쟁에서 이 결정을 근거로 소멸시효 배제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심각한 결함이 있는데도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까. 이 상황이 일단은 모두에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과거사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이 수습됐고 대법원도 시민들의 비난에서 조용히 벗어났다. 헌재는 한정위헌 부활이라는 오래된 과제를 소리 없이 해결했다. 무엇보다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주체가 국가라서 그렇다. 만약 사인(私人)이 손해배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가, 뒤늦게 결론이 뒤집혀 패소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실제로도 헌재 결정은 그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런 위험을 인식했는지 대법원이 헌재 결정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주문에 없던 공무원이란 단어를 마음대로 추가해 인용했다. 이렇게 해서 헌재 결정의 범위와 효과를 줄였다. 2020년 들어 노정희 대법관이 주심인 소부 등에서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대법원이 헌재 결정 주문에 없는 내용을 추가해 결정의 기속력을 축소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 헌재는 침묵하고 있다. 이번에는 헌재의 잘못을 대법원이 해결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작은 대법원 판결을 시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다. 나쁜 판결이라고 생각되어도 어느 정도 참으면서 사법이라는 제도를 지킬 것인지, 가능한 한 정의로운 결론을 위해 제도의 안정성을 포기할 것인지는 재판을 둘러싼 오래된 숙제다. 우리는 군사정부 시절 사법부의 너무나 많은 나쁜 판결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헌재가 법원 재판을 본격적으로 뒤집을 수 있게 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헌재 역시 나쁜 결정을 얼마든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묘기를 부리다가 시민에게 따가운 비난을 받은 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치열한 남한산성 논쟁이었지만 아쉬운 이유는, 그 자리가 이미 적의 아가리 안이었다는 것이다. 헌재와 대법원 사이의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지금 논의해야 한다. 더 깊은 혼란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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