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62)] 스리나가르(Srinagar)의 하우스 보트
[정형근 교수 에세이 (62)] 스리나가르(Srinagar)의 하우스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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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나가르의 첫인상을 채색한다면, 백지에 푸른 물감을 쏟아부은 것 같았다. /셔터스톡
카슈미르 스리나가르에 도착하니, 산은 높게 솟아 있고, 하늘은 맑고, 들판에는 푸르게 한참 자라는 벼로 가득했다. 들판 중앙을 가로지르는 가로수가 이방 여행객을 반기는 듯 잎을 펄럭였다. 스리나가르의 첫인상을 채색한다면, 백지에 푸른 물감을 쏟아부은 것 같았다. 우리의 농촌 마을보다도 훨씬 고요하고 평온했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이었다. 이국적인 생소함도 풍기지 않았다. 포근한 산야가 먼 길 달려온 여행객을 아늑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들판 길목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다. 한적하게 보이는 들판에도 무장한 군인들이 몇십 미터 간격으로 있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 앞에 젖었던 감상은 사라지고, 이내 낯선 지역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안전한 여행과 그 땅에 사는 주민들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가로수 우거진 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산길을 벗어나 평지에 이르게 되었다. 오후 1시 15분이었다. 잠무에서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바로 그 길목에 경찰의 검문소가 있었다. 우리 운전기사가 경찰관에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보여주었다. 몇 겹으로 접어진 증명서였다. 운전면허증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경찰관은 한참 훑어보더니 운전사에게 차에서 내리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은 검문초소 옆으로 데리고 갔다. 초소 안에는 다른 경찰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은 우리는 운전기사가 별일 없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 계속적으로 뒤따라오는 차량을 검문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유조차량처럼 보이는 커다란 트럭이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높다란 운전석에 있는 운전기사의 손이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 경찰관이 그 운전기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다음 순간 경찰관의 손은 그의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리고 트럭은 검문소를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트럭 운전사가 경찰관에게 뭔가를 준 것이다. 한참 만에 운전기사가 돌아왔다. 그런데 100루피를 빼앗겼다고 했다. 법 위반을 구실로 삼아 저렇게 뇌물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식당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 8시간 만에 처음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이제 목적지까지 71km가량 남았고,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못했기에 식사를 하려고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운전기사는 식당 밖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능숙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인도 어디에서나 아주 흔하게 보는 모습이었다. 깨끗한 자신의 손으로 먹는 것이 위생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손으로 먹는 것과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문화 차이로 여겨졌다.
수저를 사용해온 우리 눈에는 손으로 먹는 것이 위생적이지 못하게 보인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지면 불결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을 깨끗하게 씻으면 위생 문제는 없어진다. 남는 것은 음식 먹는 방법에 관한 고정관념이다.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수저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한 개의 수저를 수많은 사람들이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수저가 닳아지기까지 몇 사람이 사용하였을까 생각해 보면 별로 유쾌하지 않다. 말끔해 보이는 수저라도 불과 1분 전에 어떤 사람의 입속을 왕래하다가 내 식탁에 놓여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데 신경을 쓸 뿐이다. 아무튼 당연히 그 식당에서 요기를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다시 떠나야 했다.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인 하우스 보트(House Boat)에 스리나가르 입구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더니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금만 참기로 했다. 여행길에 끼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앞으로 2시간을 더 가야 했다. 들판뿐만 아니라 시내에도 군인들이 많았다. 온 도시에 경찰과 군인들 천지였다. 계엄령이 선포된 것 같았다. 도저히 관광지라고 할 수 없었다.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 부근에서는 차량도 정차할 수 없다고 한다. 폭탄 테러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서 입구에는 전투를 대비한 참호가 설치되어 있었다.
8월 9일 월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숙소는 달(Dal) 호수에 있는 하우스 보트였다. 하우스 보트는 호수 가장자리에 붙박이 배 형태의 숙소였다. 그럼에도 출렁이는 호숫물에 보트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통치할 때 여름 별장으로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수상가옥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8시 45분경 아침을 먹고 숙소 주변 어디선가 심한 악취가 풍겨왔다. 호수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몇 미터 앞에 허연 물체가 물에 떠내려오고 있었다. 죽은 고양이 사체였다. 오래되어 털도 모두 빠져버렸고 입 부분에만 검은 털이 몇 개 달려 있었다.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역한 냄새를 맡아야 했다.
스리나가르 지역은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건국신화에 의하면, Baramulla 근처에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었는데(실제로 카슈미르 지역에 위 이름의 지명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Satisar'라고 불렀다. Satisar는 힌두교 신들 중에 죽음과 파괴의 신으로 알려진 시바신의 아내 싸띠(Sati)의 땅이라는 의미였다. 카슈미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책 "Nilmat Puran"에 의하면, Satisar에는 "Jalado Bowa"라는 이름의 마귀가 살았는데, 그 마귀는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뱀의 사람들(snack people)이라고 하는 나긴(Naggin)인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나긴(Naggin)인들은 힌두교 성자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오랜 고행 끝에 힌두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Baramulla 근처의 산을 갈라서 그 속에 막혀 있던 물을 평지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거대한 양의 호숫물이 빠져나가면서 육지가 드러나고, 그 속에 있던 마귀는 결국 죽게 되었다. 그 힌두 성자는 인도에서 사람들을 불러 그 계곡에 정착하도록 하였고, 그 후 사람들은 이 계곡을 Kashyap-Mar와 Kashyap-Pura 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후에 Kashmir로 변천하게 되었는데, Kash는 'a channel'이라는 뜻이고, mir는 'a mountain'이라는 뜻으로 이는 "산의 수로"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신화에 불과하겠지만, 결국 카슈미르는 뱀의 사람들이 살았던 땅이었고, 힌두신의 영향으로 인도인들이 들어와 함께 살아가게 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땅과 물이 구별되면서 역사가 시작하였으며, 여러 민족이 혼합된 복잡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 신화를 가지고 있는 땅이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청하려니, 호수 깊은 물속에서 구렁이와 같은 큰 뱀이 보트로 기어 올라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피곤한 여행객의 뇌리를 스쳐가는 그런 환상이 잠드는 것을 방해하였다. 수상가옥 형태여서 그런지 습도가 많은 것 같고, 물을 마음껏 사용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아무튼 그 지역에 아쇼카 왕 때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힌두 왕이 지배를 하면서 잔인한 통치를 하였다. 그 후 이슬람으로 바뀌면서 샤함단이 이슬람 신자들을 데려와 3만 명을 개종시키는 성과를 거두면서 그 사회 깊숙이 파고 들어가 결국 카슈미르 전체를 이슬람화시켰다. 반면 기독교는 전통문화와 거리를 두기 때문에 개종의 열매가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곳에 거주하여 왔던 힌두인들은 많이 떠나고 현재는 인구의 5%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쳐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본래 카슈미르는 가난하지 않은 지역이었는데, 인도 정부가 개입하여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발전의 한계가 있다는 문헌도 있다. 인도 정부는 다른 주와 달리 유일하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여 민심을 얻고자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
오후 1시 25분 근처에 있는 젤럼강으로 향하였다. 사람이 앞에서 끄는 리어카와 같은 교통수단 릭샤를 타고 스리나가르 시내를 가로질러 가니 강이 나왔다. 숙소로 머물고 있던 호수와 달리 그곳은 검푸른 강물이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강폭이 100미터 안팎으로 비교적 좁았다.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물처럼 맑지 않았고, 냄새도 좋지 않았다. 강변에는 아주 낡아 보이는 하우스 보트가 빈민들의 주거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모습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엿보게 하였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은 많은 건물들이 황량하게 버티고 있고,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은 유리창이 모두 깨진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시궁창 냄새가 나는 강물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첨벙첨벙 뛰어들며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 거적으로 임시거처를 마련해 놓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경비 초소는 있었고, 경비병의 검은 얼굴에 드러난 하얀 이가 돋보였다. 바로 그 강 주변에 힌두사원이 즐비하였다. 그렇게 스리나가르의 어두운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서 빨리 더럽고 냄새나는 강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또한 황량하고 메마른 벌판 같은 강변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이국적인 모습을 호기심 있게 바라볼 여유가 없어졌다. 빨리 배에서 내려 땅을 밟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렇지만 그 강은 스리나가르 백성들의 역사이며 젖줄이기도 했기에 인내로 주변을 잠잠히 둘러 보았다.
오후 3시경 모스크 주변의 강변에서 내렸다. 골목길을 따라가니 시장이 나왔고, 주택가 옆에 푸른색의 샤함단 모스크가 나타났다. 스리나가르에 와서 처음으로 가본 모스크였다. 이슬람이 이 지역의 힌두인을 개종시켜서 그처럼 큰 사원을 건축한 것은 이슬람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게 했다. 정문에는 무장한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경비병과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모스크 입구에서 신발을 벗었다. 내부를 둘러보고 사원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했다. 온통 주변이 황량한 분위기라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깡통을 앞에 둔 사람이 돈을 내고 가라고 손짓하였다. 그냥 가면 욕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원 건물 벽에 몸을 기대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곳을 나와 소규모 상점들이 있는 시장을 지나면서 각종 과일과 빵을 구경했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모스크가 나타났다. 거리를 지나면서 보게 되는 사람들의 옷차림, 종교에 따라 차이가 나는 의상, 얼굴 표정, 상가에서 판매하는 물건들, 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저울, 주택의 형태, 초소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 지역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주택가 중앙에 위치한 사원들을 통하여 종교가 일상의 삶 가운데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짐작되었다.
3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그 지역에서 제일 큰 모스크 잠마 마시지드(Jama Masjid)로 갔다. 그런데 공간이 그리 넓지 않게 보여, 어디에 그 많은 신자들이 모일 수 있을까 싶었다. 메카 방향으로 건축된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내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2명의 여인이 기도하고 있었다. 말없이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이 하도 간절한 것 같아서 그들의 기원이 성취될 것 같았다. 한참 후에 밖에 나와 있으니 그 지역 주민인 남자 한 분이 기도를 마치고 나왔다. 나는 그분과 기념사진을 찍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슬림은 외국인을 나그네 대하듯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아 대화하기가 좋았다.
오후 4시 15분에 '막뚬사힙시라인'이라는 무덤에 갔다. 그곳은 생전에 신유의 은사를 베풀었다는 '막뚬'이라는 이슬람 성자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동일한 능력을 행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치유를 간구한다. 무덤이라고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이슬람 사원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무덤에 이르는 입구에는 쌀을 몇 줌씩 계단 위에 올려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자를 향한 선행이라고 하였다. 모스크와 달리 그곳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고침을 받고 해결되어야 할 절실한 문제를 안고 나온 무리들이었다. 특히 여자들도 많았다. 어떤 어머니는 서너 살 먹은 아이를 무덤 입구 계단에 머리를 숙여 절을 하도록 하였다. 아이는 자신의 머리도 지탱하지 못하였다. 병든 아이였다. 그 아들의 쾌유를 위하여 찾아왔을 것이다. 저 어린아이가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죽은 자의 관이 있다는 곳에는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은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어떤 여인은 출입구 앞 벽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관이 안치된 건물 안으로 들어갔더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다. 바로 옆에는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서로 받아마시려고 줄을 서 있었다. 유리로 칸막이해놓은 공간 안에는 커다란 2개의 관이 있었다. 그 무덤을 나와 건물 옆 공터로 갔더니, 스리나가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많은 나무로 뒤덮인 푸른 도시였다. 그 중앙에 달 호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루 여행을 마치고 오후 6시 무렵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하우스 보트를 오갈 때는 늘 뱃사공이 노를 젓는 보트를 타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