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37)] 이 사건 국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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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37)] 이 사건 국선이에요!

2021. 08. 13 11:31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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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합뉴스⋅편집=조소혜 디자이너

지난 1998년 형사 법정에서는 피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원인이 IMF 외환위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는 말이 빠짐없이 언급되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부도를 맞고, 근로자는 해고당하여 곤경에 처하여 결국 법을 어기게 되었다는 사연들이 구구절절 나왔다. 그런데 법정에서 변론을 하는 변호사들은 피고인에게 질문을 하면서 마지막 부분을 "⋯하였지요~잉?"라면서 어김없이 '~ 잉'을 습관적으로 붙이고 있었다. 그 부분이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에 뭔가 말할 수 없는 깊은 교감이 오가는 표현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시골 법정에서 벌어지는 변호사들의 어투가 웃긴다고 생각되었다. 얼마 후부터 나도 따라서 해보니 왠지 피고인의 형편과 사정을 공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 역시 "피고인은 ⋯했지요~잉?"을 습관적으로 연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성추행 관련 형사 사건을 선임하였다. 피고인은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 첫 재판이 열렸던 날 법정에는 광주에서 내려온 여성단체 회원들이 많이 방청하고 있었다. 해당 사건에 대한 뉴스가 지역에 퍼졌기에 광주에서 해남법원까지 내려온 것이다. 법정 안에서 피고인을 위한 변론을 할 때도 그분들의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가 내 차량으로 가고 있을 때, 법정에 있던 20여명 정도의 여성들이 나를 뒤쫓아 왔다. 그리고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 문을 꽉 붙들었다. 꼼짝없이 그분들에게 빙 둘러싸인 상태가 되어 오도 가도 할 수가 없었다. 법원 앞 주차장에서 사실상 감금된 거나 다름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얼굴들이 험악하다고 느껴졌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저런 인간을 도와줘요?"


많은 여성들이 나를 포위하듯 둘러싼 상태로 저런 말을 하니,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내 말도 좀 들어보세요! 우리나라 헌법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하고 있어요. 변호사윤리장전에도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오늘 피고인이 파렴치범이라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과서에 나온 말을 멋지게 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멍해진 상태로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싼 채 저런 철면피한 피고인을 돈 받고 변론을 해주느냐고 항의했다. 분노와 경멸스러운 눈동자들이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난감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 사건 국선이에요! 국선!"


그러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분들의 눈초리가 다소 부드럽게 변하면서 "아무리 국선이라도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도와주면 되겠어요"라고 하면서 차량 문을 놓았다. 사선과 국선의 차이를 금방 알아차려 준 것이 고마웠다. 점차 한두 명씩 내 차량 주변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저 순간에 어떻게 저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한 결과가 되었다. 물론 저 사건은 사선이었다. 저런 경험 때문에 사회적으로 비난 가능성이 큰 사건은 가능하면 수임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막상 여러 사정으로 다시 사건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낯선 해남에서 진한 사투리 섞인 말투와 지역 정서를 익혀가면서, 나 역시 그 지역 사람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 해남신문에 칼럼을 하나 기고를 했는데, 나오지를 않았다. 나중에 왜 내 글이 신문에 안 실리냐고 물었더니, 여당이나 야당의 입장도 아닌 애매한 논지의 글이라서 보류했다고 하였다. 아무리 그 지역 정서가 전부 여당 지지 성향이었을지라도 내 글이 폐기된 것은 씁쓸한 경험이었다. 서울에서 지낼 때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발간하던 '시민과 변호사'에 몇 차례 기고도 하면서 글솜씨도 있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지방지 신문이라도 글 한 편 싣기가 쉽지 않구나 싶었다.


박사과정에 입학해 둔 대학원에 다니는 것도 계속하였다. 수업에 참석하려고 해남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길은 멀었다. 해남에서 목포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부터 경희대까지 전철로 가야 했다. 그리고 수업 후에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초저녁에는 고속버스가 없어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타면, 새벽 3시 무렵에 목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택시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 깊은 밤 드넓은 시골 들녘은 고요함이 가득 차 있었다. 밝은 달빛이 산하를 비추고 있을 때는 적막감이 더했다. 달이 없는 날은 가로등도 없는 시골 도로를 심야에 달리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피곤하여 졸린 눈으로 차창 밖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했다.


"뭣 때문에 땅끝까지 내려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


그러면서도 "이렇게 고생한 보람을 나중에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다짐도 해보았다. 어떤 날은 피곤한 나머지 택시에 오르자마자 졸아 떨어졌다. "정 변호사님! 도착했습니다"라는 기사님의 소리에 일어나기도 했다. 새벽 4시 무렵 집에 들어가서 3~4시간 눈을 붙인 후 출근을 하였다. 서울 한번 다녀오면 교통비만 20만원이 넘게 들어갔다. 그렇게 시골에 내려가 있으면서도 나중에 다시 서울로 올라갈 계기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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