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7)] 방문 좀 열어줘요!
[정형근 교수 에세이 (17)] 방문 좀 열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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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보았다. 심장 부위에 아주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안개 낀 날씨에 연탄가스가 방에 스며들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셔터스톡
새벽 6시면 환갑이 넘으신 어머니는 공장으로, 형은 리어카 행상으로 나는 학교로 향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지친 몸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어머니와 형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꿈만 좇아가고 있는 게 이기적이라 생각되었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숨 막히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힘에 부쳐 허덕거렸다. 길에서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주머니에 집 주소와 주인집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갖고 다녔다. 날이 갈수록 얼굴이 눈에 띄게 야위어서, 하루하루를 힘겨워하셨다. 가을이 짙어지니 형의 벌이도 시원찮았다. 점심값도 못 벌어 종일 쫄쫄 굶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형은 밤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날이 갈수록 어두운 그림자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생각했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로마서 5:3)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 같았다. 평소 같으면 설교를 들으면 좋았는데, 그날은 달랐다. 우리 집은 환난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저히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나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교회 가서 복장 터지는 이야기 듣느니,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매일 새벽 도서관을 향하는 마음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 집은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마다 열심히 사는데,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우리 집만 힘들게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인간이 약하니까 신을 만들어 놓고 의지하고,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도 치밀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집은 저주를 받을 수가 없다. 신이 있어 나의 불경을 탓할지라도 우리 가족의 생명 말고는 가져갈 것이 없다"라는 완고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입학 후부터 집 근처에 사는 누님 집의 빈방을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잠을 그곳에서 자고, 식사는 50m가량 떨어져 있는 집에서 하였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셨는데, 나는 그만 다니도록 여러 차례 권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쉬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어느 일요일 오후 바느질을 하면서 "내 주를 가까이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가를 나직하게 불렀다.
2학기 기말고사를 보던 주간이었던 11월 29일 저녁, 어머니는 부엌에서 다음 날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내가 저녁을 먹고 방을 나서려고 하자, 어머니가 급히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장롱에서 깨끗하게 빨아 개켜 놓은 겨울 내복을 꺼내주며, 날이 추우니 가지고 가서 입으라고 하셨다. 그 속옷을 받아 들고 부엌문을 닫고 나오는데, 잘 주무시라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몸을 돌이켜 다시 문을 열려다 말고, 내키지 않아 그냥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 잘 주무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녁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자꾸 집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형이 술에 취하여 들어와 자지 않고, 편치 않은 일이 벌어져 있는지 염려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잠을 청했다.
큰 바닷가 근처의 완만한 민둥산 자락에 있는 모래밭에 흰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시골에서 살고 계시던 외삼촌이 서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저 멀리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서 나도 그곳을 떠났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를 건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엄청난 힘으로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꼭 쥐고 물가로 나오면서 꿈을 깼다.
큰 물고기를 잡은 것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정말 좋은 길몽으로 여겨졌다. 이런 날 고시를 본다면 틀림없이 합격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생길는지 궁금하였다. 상쾌한 기분으로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자욱한 안개가 방안으로 갑자기 훅 몰려들었다. 천지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평소와 달리 온통 밖이 어두웠다.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가방을 챙겨 들고 집으로 향하였다. 그래도 길몽을 꾸었다는 생각에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데모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힘차게 걸었다.
우리 집 부엌이 보이는 장소에 이르러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더니, 부엌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난 어머니가 아침을 준비하기에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 새벽어둠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늦잠을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집에 이르러 대문을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어머니가 대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날은 잠겨진 상태 그대로였다. 대문을 몇 차례 두드렸더니, 우리처럼 셋방 사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열어주었다. 전에 없던 이상한 일이었다.
부엌문을 열었더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방안은 컴컴했다. 한 발짝 들어섰더니, 두 분이 어둠 속에 그대로 누워 계셨다. 어머니! 외치며 부엌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바로 눕혔더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상체를 붙들고 흔들었는데, 다리까지 함께 움직였다. 얼굴은 방바닥에 닿아 비틀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보았다. 심장 부위에 아주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곁에 누워있는 형에게로 갔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온몸이 싸늘했다. 다시 어머니에게 몸을 돌렸다. 두 눈은 부릅뜨고 있는 상태였다. "형근이 니가 고시 붙은 걸 보지 못하고 죽으면, 아무래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결국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눈앞에서 큰아들이 함께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어머니! 제가 고시 붙으면 울겠습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부릅뜬 두 눈을 쓸어내리며 말씀드렸다. 안개 낀 날씨에 연탄가스가 방에 스며들어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토록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결국 이렇게 끝을 맺었구나!
방을 뛰쳐나와 주인을 불렀다. 주인도 새벽이라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급하게 부르는 내 소리에 놀라 깨어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와 형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가 우리 방으로 들어가 보더니, 이내 뛰어나왔다. 얼굴이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주인집 안방으로 들어가 신고를 하기 위하여 전화번호를 돌렸다. 112를 돌려야 하는지 113을 불러야 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113을 돌렸을 때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누님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새벽에 울린 전화벨에 놀란 누님이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누님은 잠긴 목소리로 몇 번을 되물었다. 방을 나왔다.
아무래도 파출소에 직접 가서 신고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급히 골목을 뛰어 내려왔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한 골목만 지나면 파출소가 보이는 길을 달리던 중 어머니가 생전에 다니셨던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설교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그 경황이 없는 중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환난 날에도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그토록 운명 같은 환경을 저주하며 지내지는 않았겠구나! 이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게 두 분과 사별하지 않았겠구나!" 말할 수 없는 회한이 걷잡을 수 없이 오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헉헉거리며 달렸다.
파출소에 들어가 신고를 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우리 집골목 어귀에서 들려 왔다. 어느 병원 응급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이 이불 앞뒤를 붙들고 시신을 응급차가 있는 곳까지 옮기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에 많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응급차에 올라타 양손으로 두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붙들었다. 경찰 순찰차가 응급차 앞을 달리며 교통정리를 하였다. 도로를 달리던 택시들이 멈춰서며 유리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 손짓들이 정말로 고맙게 느껴졌다.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다른 연탄가스 환자가 의료기계를 이미 사용 중이라고 하였다. 간밤에 안개가 자욱하여 연탄가스 중독환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했다. 다시 제기동에 있는 동부시립병원으로 달렸다. 의사가 청진기를 갖다 대보고, 간호사가 코에 무슨 기계를 넣어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망이 선언되었다. 응급실 한편으로 두 시신은 밀쳐져 버렸다. 나를 이 땅에 보내준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불에 둘둘 말려져 있었다. 유독 작고 왜소한 체구였다. '저분이 내 어머니였나? 이렇게 생을 마칠 줄 알았다면, 내가 초등학교 시절 농약을 먹고 자살하려고 할 때 말리지 말아야 했는데⋯. 괜히 어린 마음에 농약병을 빼앗아서 그 고난의 세월을 살아오도록 만들었구나!'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벽제 공동묘지로 가게 되었다. 장의차 두 대를 빌렸다. 출발하려는 순간에 강진에서 올라오신 외숙모님과 외사촌 누님이 차에 올랐다. 어머니를 실은 차가 앞서고, 그 뒤를 형을 태운 차가 뒤따랐다. 뒤따르는 형의 영정을 보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강진에서 오신 외숙모님은 지난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방문 좀 열어주세요!"고 애타게 소리를 치더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영혼이 강진까지 갔었나 보다. 간밤의 꿈속에서 외삼촌과 어머니가 헤어지는 장면은 결국 두 남매가 사별하는 장면이었다.
법대 동기들이 운구를 도와주었다. 공동묘지에 도착하니 인부들이 위, 아래에 두 개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 먼저 어머니 관을 하관했다. 장지까지 오신 어머니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흙을 먼저 덮으라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딱딱하게 굳은 흙을 쏟아붓다 보니, 그 아래쪽에 형의 관이 뎅그렇게 놓여 있었다.
"형님! 당신 어머니가 죽었어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일어나요!"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