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 학교 어디 나왔어요?
[정형근 교수 에세이 (1)] 학교 어디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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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편집자 주-
법조와 법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경희대 로스쿨 정형근 교수가 지나 온 감동의 라이프 스토리를 연재로 전한다.
또래 아이들이 등교할 때 그는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으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된다. 만학도로서 법대 진학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그해에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깊은 비탄을 안고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36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원을 충원하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된다. 그는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정형근 교수의 ‘New & Living Way’
1980년 4월 초순경 부산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살던 중에 생전 처음으로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설 때 비가 엄청 쏟아졌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집을 떠나는 나를 배웅하면서 “많지도 않은 형제가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안쓰러워하셨다. 아들이 공무원이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근무지가 부산이라서 함께 살던 형님과 헤어지게 되어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아쉬워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23세에 검찰공무원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 기뻤다. 가난하여 고등학교도 못가고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공무원이 된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평일이라서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내 좌석 건너편에는 풍채가 좋고 양복을 입은 연세 지긋하신 분이 있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들뜬 마음에 그 분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부산지방검찰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 분은 "검찰청을 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검찰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아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고개를 돌리며 나를 매우 관심 있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고시 붙었오?”
‘고시’라는 말에 순간 주눅이 들었지만, 태연하게 “검찰서기보 시험에 붙었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나에게서 눈길을 돌려버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가 무안만 당했다.
부산에 도착하여 검찰청이 가까운 부민동에 하숙집을 정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검찰청에 첫 출근을 했다. 서무과에서 먼저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를 작성했다. 평소 입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까지 신고 있으니 어색하고 답답한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하는 일 없이 서무과에 앉아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지 않고 수화기를 들면 곧바로 교환원이 나오는 전화기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자 기록관리과 수형계라는 곳으로 배치되었다.
검찰청 1층에 위치한 기록관리과 안에는 수형계, 보존계, 영장계가 있었다. 내 책상은 맨 끝, 말단(末端)에 있었다. 나는 말단 공무원이었다.
내가 근무한 ‘수형계’는 형사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피고인의 죄명, 선고받은 형벌의 종류, 인적사항 등을 ‘수형인명부’에 기재하는 일을 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펜으로 하루 종일 명부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피고인이 살던 구청이나 면사무소에 형사재판의 결과를 통지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 신원증명서를 발급해 줄 때 형사처벌 받은 것을 기재해 준다고 했다.
수형계 곁에는 '보존계'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는 재판이 끝난 형사기록과 판결문을 창고에 보관하는 업무를 하였다. 그곳은 형사기록이나 판결문을 복사해 달라는 민원인들의 방문이 많았다. 늘 시장처럼 바글바글했다.

사무실 한편에는 '영장계'라는 곳도 있었다. 거기서는 경찰관이 구속영장이나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는 수사기록을 접수하여 검사실로 올려 보내는 등의 업무를 하였다. 영장계에는 직원이 단 2명(계장 1명과 검찰서기 1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늘 싸우는 듯한 큰소리가 났다.
특히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사건기록을 가지고 온 경찰관의 출입이 많았는데, 젊은 검찰서기는 사소한 서류의 미비를 지적하며 경찰관을 혼내는 듯한 아주 고압적인 모습을 보였다. 서류에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등, 그런 내용 같았다.
영장계장은 그보다 더했다. 수사기록을 가져온 경찰관들에게 “당신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마치 수사기록을 집어던져 버릴 듯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영장계 직원들이 경찰관들과 시비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근무 시작 며칠 뒤에 공무원증과 검찰청 출입증을 받았다. 몇 번이고 그걸 쳐다보며 자랑스러워했다. 월급은 약 10만원 가량이었고, 그 중 5만원은 하숙비로 나갔다. 남은 돈은 어머니에게 부쳐드리곤 했다.
퇴근 후에는 하숙방에 식탁을 펴놓고 7급 검찰공무원 시험공부를 했다. 7급 시험에 합격한 후에 사법시험에 도전하자는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급 검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던 것도 일단 빵 문제를 해결한 후 앞으로 고시에 합격하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종일 근무하여 피곤한 상태에서 퇴근하여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붙들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어떻게 고시에 붙을 수 있나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어떤 할아버지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아 징역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 내용이 기재된 부친의 판결문을 찾아달라고 신청을 한 것이다. 그 판결문이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요청한 판결문을 찾으려고 선임 직원과 함께 부산교도소로 갔다. 처음으로 교도소 구경할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지만, 교도소 안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교도소 옆에 있는 나지막한 건물에 일제 때 판결문이 보관되어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 호주머니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출입구에 꺼내 놓았다.
밖에는 봄기운이 완연하여 따스한데, 실내는 아주 차가웠다. 오랜 세월 탓인지 곰팡이 냄새도 났다. 창호지 같은 맨질맨질한 종이에 붓으로 단 한 자도 수정한 흔적이 없는 판결문 묶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민원인의 부친이 언제, 어느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나 막연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을 한 분이 뒤늦게라도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찾았다.
판결문을 묶어둔 책의 첫 면에 피고인의 이름이 기록된 목차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목차만 보지 않고 한장 한장 넘기면서 피고인의 이름과 죄명, 선고받은 형의 종류를 세심하게 확인하였다.
판결문 보관소에는 조그만 창문이 있었다. 호기심에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여자교도소 운동장이 보였다. 여성 복역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까르르 웃기도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 모두들 심각한 표정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 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왔다. 교도소 담장에는 민들레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선임 직원(박사용 님)이 “퇴근 후에는 하숙집에서 뭘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사법시험에 도전하기 위해서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학교 어디 나왔어요?” 라고 대뜸 물었다.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 못가고 검찰에 입사하였다는 사정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 분은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지 말고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간 고교에 입학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한다고 하면, 머리는 깎지 않도록 봐줄 것이라고도 했다. 그 당시에 중고생들은 까까머리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교 졸업 후에는 반드시 대학을 가야한다고 했다. 만약 대학을 가지 않으면, 먼 훗날에 따뜻한 봄날 부산교도소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진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분은 정말 진지하게 충고해 주었다. 고등학교 문턱도 못 가본 내가 대학을 가야 한다니! 정말 엄두가 안 나는 말이었다. 가부간에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담배를 깊이 빨아 마셨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