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無성욕자 청각장애인 성추행범으로 몰아 재판에 넘긴 지하철경찰대, 재판에서 '망신'
[단독] 無성욕자 청각장애인 성추행범으로 몰아 재판에 넘긴 지하철경찰대, 재판에서 '망신'
9호선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의심받던 청각장애인에 무리한 수사
재판부 "추행 있었는지 '매우' 의문"⋯278일 만에 혐의 벗어
해당 사건 담당한 유진영 변호사 "기본적인 절차도 안 지켜진 안타까운 사건"
![[단독] 無성욕자 청각장애인 성추행범으로 몰아 재판에 넘긴 지하철경찰대, 재판에서 '망신'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2020-02-07T19.12.43.260_879.jpg?q=80&s=832x832)
지난 2019년 3월 18일 9호선 퇴근길에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법으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했다. 해당 사진은 사건과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코리아
지하철에서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선 피고인. 피해 여성은 "10분간 엉덩이 아랫부분에 뭉툭한 뭔가가 닿는 걸 느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할 지하철경찰대의 영상 증거도 있었다. 분명 두 사람은 밀착돼 있었다. 피고인은 "절대 아니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 주장이 통하긴 힘들어 보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볼 것도 없이 유죄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막상 재판이 개시되자 '이상한 점'들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경찰 수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문제 제기와 함께, 수사 내용이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지난 2019년 3월 18일 저녁 7시 25분쯤. 퇴근 시간대의 9호선은 '지옥철'이었다. 천안에 살아 서울 지하철 이용에 익숙하지 않았던 피고인 A씨는 겨우겨우 9호선에 탑승했다.
발 디딜 틈 없는 간격. 그렇게 10분 정도를 몸이 끼어있는 상태로 이동했다. 당산역에서 내린 A씨는 갑자기 다가온 지하철 경찰대에 성추행 혐의를 추궁당했다. 사실 추궁당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 능력(지능지수 80 초반)을 가진 청각장애인이었다.
무리한 수사 ① 피해자에게 범죄 암시
이 사건은 피해자의 신고로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경찰이 가만히 있던 피해자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러고는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느냐"며 물어봤다. 전동차에서 미리 촬영한 동영상도 보여줬다. 피해자는 "추행 사실이 명확하다면 피고인의 처벌을 원한다"는 애매한 답을 내놨다.
경찰은 이 '피해자 진술'을 근거로 A씨를 추궁했다.
무리한 수사 ② 지켜지지 않은 '미란다 원칙'
경찰은 법률이 장애인에게 보장하도록 하는 절차들을 무시했다. 변호인에 따르면 현장에서 '미란다 원칙'은 제대로 고지되지 않았다.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피고인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후에도 임의동행 거부권, 변호인 조력권 등을 안내받지 못했다.
대신 몇 시간에 걸쳐 진술서를 쓰도록 하고, 피의자신문까지 받도록 했다. 모두 사건 당일 벌어진 일이다. 조사과정에서 "조사는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는 안내를 해주거나 "지금 조사를 받고 있다"고 가족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변호인의 도움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경찰이 작성하고 A씨가 도장 찍은 조서에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이 여럿 등장한다. A씨는 "고의로 밀착한 게 아니다"고 극구 부인하다가, 경찰이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물으면 "혐의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무리한 수사 ③ 증거 영상 속 모순
물증 속 결정적인 모순도 있었다. 피고인의 키는 176cm 였는데, 피해자(161cm)와 15cm 차이가 났다. 피해자는 줄곧 "피고인의 성기 부위가 엉덩이 아래쪽에 닿은 것 같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이 정도 키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는 가해자 성기 부위가 피해자 엉덩이 윗 부분이나 허리에 접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게 아니라면 피고인이 무릎을 굽히는 등 자세를 낮췄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이 찍은 영상 어디를 봐도 피고인은 줄곧 똑바로 서있었다. 변호인은 "당시 A씨 바지 앞주머니에 딱딱한 담배갑과 라이터가 있었는데 이것이 피해여성에게 닿았을 수 있다"고 변론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14단독 추성엽 판사는 지난해 12월 20일 "공소사실과 같은 추행이 있었는지는 매우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매우 의문이 든다'는 표현은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나 기소한 검찰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표현이다.
추 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상체가 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전동차 내에는 승객이 매우 많아 대부분의 승객들이 밀착한 상태로 탑승하고 있었다"며 "피고인이 피해자의 신체에 보다 적극적으로 밀착하는 등의 상황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A씨는 사건 이후 278일 만에 혐의를 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의 힘들었던 과정이 수사관과 A씨가 주고받은 문자에 그대로 녹아났다. "같이 가주실 동반자가 없습니다", "대화가 어렵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청각장애 2급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본인의 장애를 수사 과정에서 감안해달라는 취지였다. 형사소송법도 "피의자가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경우 피의자와 신뢰관계자를 동석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A씨 어머니는 재판부에 "경찰관분도 저한테 연락을 취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몇 개월이 지나도 몰랐다"는 탄원서를 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정향의 유진영 변호사는 "청각장애 2급인 A씨의 경우 의사소통이 힘들기에 기본적인 적법절차를 더욱 충실히 지켜야 했다"고 했다.

유 변호사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청각장애 2급인 A씨에게 임의동행 거부권이 제대로 고지않은 상태에서 임의동행이 이루어졌고, 굉장히 이례적으로 자술서까지 쓰도록 요구받았다"며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 정상적인 피의자조사가 곤란하므로, 변호인이나 가족 동석하에 피의자 진술을 할 수 있도록 형사소송법 제244조의 5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데, 그와 같은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진영 변호사에 따르면, A씨는 성욕이 없다는 이유로 지난 2015년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전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이혼했다"고 이번 재판을 위해 별도의 진술을 남겼다. 재판부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전 부인은 "신랑이 여자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 정도로 성욕이 없는 사람이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추행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취지의 변론이었다.
이 사건은 항소심(2심)을 앞두고 있다. 검사가 1심 선고가 나온 지 6일 만에 "2심 재판을 다시 받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