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끈다고 퇴근 아니었다…38세 은행원 덮친 ‘보이지 않는 야근’
PC 끈다고 퇴근 아니었다…38세 은행원 덮친 ‘보이지 않는 야근’
근로복지공단 '유족급여 거부' 결정, 법원이 뒤집었다

심장마비로 숨진 은행원 A씨에 대해 법원이 과로사를 인정했다. /셔터스톡
38살. 은행 입사 11년 차, 4급으로 승진해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은 A씨의 삶은 거기서 멈췄다. 휴일 골프연습장 주차장, 자신의 차 운전석에서 A씨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A씨의 죽음 뒤에는 PC 로그인 기록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 노동’과 실적 압박이라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법원은 A씨의 죽음이 명백한 ‘과로사’라고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며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한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이 판결은 단순히 근무 시간 기록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업무 스트레스가 어떻게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지를 법의 잣대로 인정한 사례로 남게 됐다.
책임감과 압박감에 짓눌린 두 달
A씨는 2012년 은행에 입사해 10년 만인 2022년 4급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사망하기 불과 두 달 전인 2023년 1월, A씨는 심사센터로 자리를 옮겨 기업 여신 심사라는 중책을 맡았다.
A씨의 업무는 영업점의 권한을 넘어서는 거액의 대출을 심사하는 일이었다. 작은 실수 하나가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징계나 손해배상으로 돌아왔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영업점은 어떻게든 대출 승인을 원했지만, A씨는 냉정하게 상환 능력을 따져야 했다. ‘승인’과 ‘거절’ 사이에서 A씨가 겪었을 정신적 압박은 상당했다.
실제로 A씨는 사망 직전 5건의 대출 심사를 불승인했고, 동료는 "이 과정에서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며 막중한 책임감과 갈등 상황에 놓였던 두 달은 A씨에게 치명적이었다.
‘주 46시간’ 기록 뒤에 숨은 진실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업무용 PC 로그인 기록을 근거로 주 평균 근무시간이 46시간에 불과하다며 과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정법원은 “직원들이 외부망 PC나 개인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며, 공식 기록에 잡히지 않는 실질적인 업무 시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A씨의 1주 평균 업무시간이 실제로는 52시간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는 법원이 과로사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법원은 일반적으로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할 경우 업무와 질병 사이의 관련성이 높다고 본다. A씨의 사례는 공식적인 기록만으로는 현대 직장인의 노동 강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현실을 법원이 꿰뚫어 본 것이다.
법원은 "만성적인 과로나 업무 관련 스트레스가 급성심근경색 발병에 기여했거나 자연적인 경과 이상으로 악화시켜 사망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보는 과로사 인정 기준
법원의 과로사 인정은 단순히 근무 시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씨의 경우처럼 업무의 강도, 책임의 정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종합적으로 고려된다.
한 경찰서 과장은 코로나19 대응, 선거 업무, 집중호우 대처 등 특수한 상황이 겹치며 격무에 시달렸다. 그의 사망 전 12주간 주당 근무시간은 최소 68시간이 넘었다.
법원은 이처럼 명백한 장시간 노동과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를 수행한 점을 들어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전주지법 2022구단804).
반면, 모든 죽음이 과로사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서울고등법원은 휴일에 잠을 자다 급성 심장사로 숨진 한 군인에 대해서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2022누39859 판결).
재판부는 사망 원인인 ‘비후성 심근병증’이 의학적으로 과로나 스트레스와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같은 심장질환이라도 그 원인이 업무와 직접 연결된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법원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원은 설령 근로자에게 고혈압 등 개인적 위험 요인이 있더라도, 업무상 과로가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 이때 인과관계는 건강한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바로 그 근로자의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A씨의 죽음은 PC를 끈 뒤에도 끝나지 않는 노동의 무게와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지, 법원이 그 사회적 책임을 인정한 판결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