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의 배신, 일상을 위협하는 새로운 전세위기
'집주인'의 배신, 일상을 위협하는 새로운 전세위기
조직적 사기범만이 문제가 아니다
개인 집주인의 재정난이 부른 '일상형 전세사기' 확산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대규모 전세사기 못지않게 심각한 개인 집주인의 보증금 미반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빌라왕' 같은 조직적 사기가 아닌, 평범해 보이던 집주인들이 집값 하락과 개인 사정을 이유로 세입자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례가 늘고 있어 사회적 경각심이 요구된다.
"3000만원도 없다"던 집주인, 재력 과시는 허상이었나
2022년 8월, 부천 역곡동의 한 주택에 전세 계약을 맺은 직장인 A씨. 당시는 전세값이 최고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A씨는 "부동산 분위기 자체가 매물이 거의 없던 상황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등기부등본상 근저당이 전혀 없는 '깨끗한' 집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계약한 A씨였지만, 2년 뒤 재계약 시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집값과 공시지가가 하락하면서 HUG(주택도시보증공사) 보증보험을 갱신하려면 기존 보증금에서 3000만원을 낮춰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문제는 집주인의 반응이었다. 계약 당시 "땅도 많고, 아내는 식당을 운영한다"며 재력을 과시했던 집주인은 A씨의 3000만원 반환 요청에 "알아보겠다"고 답한 뒤, 2주 후 "돈을 구하지 못했다"고 통보해왔다.
A씨는 "당장 3000만원도 못 돌려주는 사람이 나중에 1억원이 넘는 보증금 전액을 제때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즉시 계약 해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근저당 없는 건물, 그런데 왜 경매에 넘어갔을까
더욱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 18가구 규모 다가구주택에 거주하는 B씨의 경우, 집주인이 아예 건물을 포기하며 경매에 넘긴 상황이다.
이 건물 집주인은 2019년경 약 20억원에 건물을 매입했으며, 18가구 전세 보증금 총액은 2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건물은 등기부등본상 선순위 근저당이 단 한 건도 설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집주인은 세입자들에게 "노후 준비를 위해 건물을 샀는데 이렇게 됐다. 돈이 없으니 경매를 통해 해결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사실상 연락을 피하고 있다.
B씨는 "깨끗한 등기부만 믿고 계약했는데, 왜 집주인이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보증금 반환을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세입자들의 자구책, "우리가 직접 나서야 했다"
현재 이 건물의 경매는 진행 중이다. 최근 법원의 1차 감정평가액은 토지 가액을 제외하고도 4억원에 불과해 세입자들이 집단으로 이의를 제기한 상태다.
B씨를 포함한 세입자들은 단체 대화방을 통해 직접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적 대응에 나서는 한편, 건물 수도세 등 공과금까지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A씨는 결과적으로 HUG를 통해 보증금 전액을 반환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HUG의 공식적인 안내나 도움보다는 인터넷의 다른 피해자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의 후기 글이 서류를 준비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됐다"며 당시의 막막함을 전했다.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A씨는 "결과적으로는 운이 좋게 전액을 돌려받았지만, 집주인과 연락이 끊길까 봐 수개월간 마음 졸여야 했다"며 "'집'이라는 공간이 더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심경을 밝혔다.
반면 B씨를 포함한 다가구 주택 세입자들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B씨는 "집주인은 연락이 안 되고 세입자들끼리 모여 법률 절차부터 공과금 정산까지 직접 하고 있다"며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은 물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직적 전세사기가 아닌 개인 집주인의 재정난이나 의도적 파산으로 인한 피해 사례가 늘어나면서, 전세 계약 시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