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4)] 피의자신문조서는 타이핑해야 해요!
[정형근 교수 에세이 (24)] 피의자신문조서는 타이핑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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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첫날부터 피의자가 구속된 있는 절도죄 사건이 배당되었다. 피의자신문조서를 몇 장 가져다 놓고 볼펜으로 작성해 가려고 하였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검사실에 있던 직원이 갑자기 외쳤다. /셔터스톡
어느 날 같은 반 조권탁 동기가 나에게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고시 잡지사에 합격기를 써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원고 마감일을 맞추지 못하겠다며, 사법시험 합격기를 대신 써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러 모임으로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차분히 합격기를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원고청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잡지사 주필을 만나서 양해를 얻은 다음에 쓰자고 했다. 수업 후에 그 동기와 고시잡지사를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며 승낙을 받았다. 3~4일 안에 급히 써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지난 추억을 묻혀버리기 아까웠다. 3일 동안 200자 원고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가면서 "NO CROSS, NO CROWN" 제목의 합격기를 썼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기 덕분에 실패로 점철된 나의 고시 역정(歷程)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사법연수원 생활은 치열한 경쟁과 함께 선택받은 자들의 자부심을 느끼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지도 교수님은 "정형근 씨는 지갑에 얼마를 넣고 다니나요?" 물었다. "3만원이요." 왜 물었는지 알 수 없지만 별로 돈 쓸 일도 없었고, 그런 지갑 사정과 상관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연수원에서 1년을 보내고, 2년째 때는 법원, 검찰청, 변호사 업무에 대한 실무수습을 나가게 되었다. 수습기간은 기관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법원에서 민사와 형사 실무수습은 6개월, 검찰 실무수습은 4개월, 변호사 실무수습은 2개월, 관련 분야 실무수습은 1개월로 짜여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실습을 전부 마친 후에는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가서 후기교육을 3개월 받아야 했다.
실습을 나가는 법원, 검찰청을 정하는 기준을 나이 순서로 하였던 거 같다. 대부분 서울에 있는 법원 등지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젊은 동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검찰 실습을 먼저 시작하게 되어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현재 서울북부지검)으로 배정되었다. 검찰청에 출근을 했더니 지도검사실 출입문 바로 옆에 조그만 책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검사직무대리"라는 쓰인 조그만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게 내 책상이었다. 그 검찰청에서 4개월 동안 '검사직무대리'로 여러 범죄로 구속되어 있거나 불구속 상태에 있는 피의자에 대한 신문조서도 작성하고, 공소장과 불기소장을 작성하는 업무를 하였다.
출근 첫날부터 피의자가 구속된 있는 절도죄 사건이 배당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시가 넘자마자 교도관이 포승으로 두 손을 결박한 피의자를 데리고 검사실로 들어왔다. 내 책상 오른쪽에 피의자가 앉아 있고, 그 곁에는 교도관이 감시하고 있었다. 피의자의 체격이 상당히 커서 아무리 두 손이 묶인 상태였지만, 왠지 긴장이 되었다. 먼저 경찰에서 작성하여 송치한 수사기록을 읽어보니 별로 어려운 사건은 아니었다. 이미 경찰에서도 자백을 하였고, 증거물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범죄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을 받고 조서에 도장을 찍으면 가볍게 마칠 거 같았다. 피의자신문조서를 몇 장 가져다 놓고 볼펜으로 작성해 가려고 하였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검사실에 있던 직원이 "시보님! 피신(피의자신문조서)을 볼펜으로 작성하면 안 되고 타이핑을 해야 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타자기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타이핑을 해본 적이 적이 없었다. 컴퓨터와 같은 기계 조작에 관심이 없어 타자를 익힌 적도 없었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 후배의 컴퓨터가 있었지만, 한 번도 자판에 손을 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타자기로 실제 문서를 작성하려고 하니 암담했다. 조서 종이를 타자기에 끼워놓는 것부터 힘들었다. 그리고 자판을 보면서 두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눌렀다. 질문과 답변 내용을 작성해 가는 것이라 신속하게 타이핑을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후 1시경부터 시작한 피의자신문을 오후 5시가 될 때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그때까지 타이핑한 게 채 두 장도 안 되었다. 긴장 상태에서 타자를 하니 오타도 계속 났고, 그걸 수정하려 드니 뒤로 후진하는 '타다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실습 나온 첫날에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긴장해 있던 피의자도 나중에는 나의 형편없는 타자 실력을 금방 알아챘다. 질문을 해도 "아, 경찰에서 말한 그대로 적으세요!"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자꾸 몸을 앞으로 숙여 내 책상 앞으로 고개를 쭉 내밀곤 하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했던 거 같았다. 검사실이라 검사는 정면에 앉아 있고, 그 옆에 계장이 있어 자신을 신문하는 내가 누군지 책상 위에 놓인 '검사직무대리'라고 기재된 명패를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컴퓨터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손글씨를 주장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자신을 한없이 자책했던 오후였다.
그때까지 작성한 조서를 보니 3페이지에 불과했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분량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것도 오타를 낸 부분을 수정하는 바람에 종이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조서 작성 시간이 오래 걸리자, 그 피의자는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도관도 구치소에 피의자를 빨리 데리고 가야 한다고 빨리 끝내줄 것을 독촉했다. 오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검사실도 하루 일과를 마친 분위기였다. 검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직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간신히 조서 작성을 마친 후 피의자를 데리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오후 내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검사님에게 보여드렸다. 검사님은 증거물을 피의자에게 제시하여 확인해야 할 것이 누락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소환하여 조사하라고 지시하셨다. 평소에 기계에 관심이 없던 나는 컴퓨터와 운전은 하지 않고 지낼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 안이한 생각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던 날이었다. 그날 퇴근하자마자 노트북 컴퓨터를 구입하였다.
1. 섭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합격기를 쓸 기회가 오리라 믿었던 것이 오늘에야 이루어진 셈이다. 합격의 감격도 지난 역사의 한순간으로 기록되고, 새로운 날을 잉태하는 순간들이 매일 다가서고 있다. 수험시절에는 봄이 오는가 싶으면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사법연수원에 화사하게 어우러진 꽃들이 새내기들을 축하하고 있다. 얼마나 누려보고 싶었던 순간인가 감회도 깊은 게 사실이다. 새 인생의 출발을 앞두고 묻혀진 지난날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남은 여정을 예비하고자 이 글을 적게 되었다.
사법시험을 처음 생각한 것은 중 2 때다. 당시에 뇌리를 메웠던 최대의 것은 '사람의 장래가 결정되어 있느냐, 아니면 결정되어 가는 것인가'였다. 결론은 후자였다. 이로써 긴 고시여정이 태동하게 되었다. 19세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보통보다 늦은 셈이다. 어려운 현실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학을 포기하게 했다. 현실 문제보다는 스스로 남은 생을 개척해 가고자 택한 길이라 함이 솔직할성싶다. 고등학교 진학은 못 했으나 이로 인해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보고자 했다. 이유는 사법시험 도전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의 조언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당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운 선택을 한 것이다. 강진 읍내에 가서 고교참고서를 잔뜩 사 왔다. 무슨 책을 먼저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하여 정규 교육을 받은 상태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만 깊었다. 매일 15시간 정도 홀로 공부했다. 이러기를 5개월여를 하다 검정고시 원서를 내는 일자를 문의하기 위해 광주교육청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 바로 그날 검정고시를 보는 날이라는 것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해에는 시험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소 허탈하고 섭섭했으나 다시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대학교를 가지 못할 바에야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는 것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바로 사법시험에 도전키로 했다. 열아홉 청년의 기상인지, 만용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광주(光州)에 있는 큰 서점에서 사법시험 과목에 관한 모든 책을 한꺼번에 샀다. 서점주인은 각 과목마다 누구의 책을 찾느냐고 물었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무 책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과연 아무 책이라도 무관할 수 있는가? 해답은 자명한 것이다.
집을 떠나 공부하기로 했다. 적당한 절을 찾기 위해 인적이 드문 산등성을 숨 가쁘게 올랐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의 계곡은 초가을 단풍이 물들어 오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흥분을 느끼며 중학교 때 소풍을 갔던 대구면에 있는 정수사로 갔다. 인가가 없어 조용한 곳이었다. 스님을 만나 사연을 말씀드리자 "한 달에 십만원을 줘도 하숙을 안 친다"며 첫마디에 거절당했다. 다행히 그분이 대덕에 있는 탑산사를 소개해 주어 다음 날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짊어지고 어머니는 이불을 이고 탑산사로 올랐다. 사뭇 각오가 비장했다. 한 달에 9500원에 지내기로 했다. 처음 집을 떠났기에 몹시 외로웠다. 그때마다 천관산 정상에 올라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나의 마을과 실타래처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처음 접하는 법률서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해 중학교를 졸업한 상태에서 헌법, 민법을 보니 이해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어찌하든 사법시험은 붙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알든 모르든 매일 읽어나갔다. 그 절에서 함께 지내며 복학을 준비하고 있던 분의 충고로 서울로 가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나 역시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있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 여겨졌기에 그분의 조언에 응하게 된 것이다.
20세가 되던 1976년 1월 4일 상경했다. 생전 처음 보는 기차요, 장거리 여행이었다. 화곡동에 있는 어느 독서실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친척도 없고 경제적 여건도 궁핍하여 독서실에서 24시간을 보내야 했다. 밤이면 의자 서너 개를 일렬로 하여 누워야 했고, 버너로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곳 이용자들의 호기심과 함께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중졸자가 고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분명 나는 돈키호테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법은 깨우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의 궁핍으로 끼니를 건너뛰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송금할 입장이 못 되었다. 빵 몇 쪽과 라면으로 연명해 가야 하는 형편이 계속되었다. 풍족하지는 못하나 항상 배불리 먹고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고향집이 몹시 그리웠다. 항상 포근함을 주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매고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순간의 고통 앞에 헛되어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힘든 현실과 열악한 학력에서 비롯되는 공부의 부진을 극복하고자 독서실 옥상에 올랐다. 백지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어금니로 물어뜯었다. 아무리 물어도 표피가 찢어지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그리도 쉽게 혈서를 쓰던데. 할 수 없이 면도칼로 베었다. 그리고 흰 종이 위에 마음의 결심을 담았다.
"必勝"
2. 신념
아무래도 사시공부는 무리였다. 그동안의 체험과 주변의 빗발치는 충고를 받아들여 9급부터 7급을 거쳐 고시에 도전키로 했다. 검찰서기보 시험을 먼저 보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해 가을에 보았던 시험에서는 역부족을 확인하는 것을 막을 내렸다. 21세가 되던 해에는 절대적으로 합격해야 한다는 각오로 아랫글을 새겼다.
오늘의 이 一步가
내일의 百步가 될지니,
내 이제 심기일전
필승의 신념을 사생의 맹서로 삼아
촌음을 아끼리라.
독한 마음으로 방황 없이 공부했다. 대명학원에서 종합반 수강도 한 여파에 힘입어 필기시험에서 합격했다. 비록 적은 결실이었지만 셋방에 모여 살던 어머님과 형제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그런데, 100명을 뽑는다는 공고와 달리 150명이 필기시험에 합격하였다. 서울고등검찰청에서 면접을 보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더구나 다른 직종과는 달리 검찰직은 면접에서 1/3을 탈락시키는 것도 모르고 나는 차례를 기다렸다. 지루한 대기 후에 2명의 검사 앞에 앉게 되었다. 가벼운 질문이 있었다. 끝날 무렵에 "형의 시효와 공소시효의 기산점이 언제죠?"라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떨결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실을 나올 때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니라 다를까 "귀하가 최종 불합격자로 결정되었기에⋯."라는 통지서가 며칠 후에 도달되었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해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이것은 나의 수험여정에서 맞이하게 될 아주 적은 실패의 시작이었다.
마음은 힘들었으나 실패감으로 무기력하게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앞에 닥친 빵문제 해결은 중대한 문제였다. 선택의 여지 없이 공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힘에 겨워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빈번한 철야 작업을 하면서 황량한 장안동 벌판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땅이 많은 가능성을 예시하는 듯했다. 저 벌판은 내가 달려갈 광야와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형님과 함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쌀과 연탄값 그리고 사글세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황금 같은 장래를 죽이면서 청년이 생계유지를 위해서 살 수만은 없었다. "이빨을 악물고 두 눈을 부릅뜨면 장래가 열리고 미래가 보인다"는 각오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22세에 한양대에서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어 필기와 면접시험 모두 합격했다. 이는 정말로 하찮은 한발에 불과하였지만 큰 걸음이었다. 그해 가을 방위복무를 하게 되었다. 격일제로 출근하는 야간 경계병이었으나 공부하기에는 적격이었다. 7급 검찰직을 준비했다.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야 어쩔 수 없이 힘겨운 현실에 지배되었으나, 이제는 내 힘으로 장래를 개척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격자 명단에 내 번호가 없다는 전화의 금속성 소리에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수화기를 올려놓을 힘도 없었다. "또 안됐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나!" 발길이 가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비좁은 방 한 칸에 어머니와 형님, 누나, 여동생이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의 나의 고뇌들이 얼마나 감상적 사념이었던가를 절감했다. "아무 생각 말고 앞만 보고 가자!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꺾이지는 말자! 나에게 우리 집의 장래가 달렸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나의 신념과 의지에 축복을 내릴 것이다."
24세가 되던 1980년에 병역을 마쳤다. 다시 응시하고자 대명학원에서 경제원론 강의를 수강하던 중 부산지방검찰청으로 9급 발령을 받아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하숙방에서 책을 보았다. 직장에서의 업무도 힘든 일인데, 주경야독의 고통은 무척이나 더한 것이었다. 하루는 선임직원과 함께 교도소에 보관 중인 일제시대 판결문을 찾으러 가게 되었다. 그분은 내가 수험준비를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만약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며 반쪽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중졸에서 어떻게 대학을 갈 수 있는가 싶어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부산교도소 기록보관소에서 인생을 크게 보고 살아가라고 충고했던 박사용씨의 음성이 귓전에 새롭다. 당시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 있다면 같은 충고를 드리고 싶다.
3. 어머니
아무래도 시험을 합격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직장을 서울로 옮기고자 했다. 마침내 6개월 후에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전보되었다. 드디어 수험준비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객지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도 없어서 좋았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즐겨 피우던 담배도 격일로 피웠다. 의지를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 퇴근 후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침낭 속에서 새우잠을 잤다. 직장 분위기에 젖지 않고 투쟁 정신을 유지하고자 도시락을 지참했다. 25세에 다시 7급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그 해부터 각종 공무원 시험에 국어가 추가되었다. 고등학교를 못 다닌 내게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고문(古文)편은 심히 어려웠다.
시험을 마치고 동료와 함께 술을 마셨다.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이런 길을 가야만 하는가! 현실에서 체념하고 사는 것이 현명한데, 분수도 모르고 이러는 것인가! 술기운에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래도 종국적인 목적이 아닌 것에 세월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시에 붙어야 하는데, 그 중간 단계인 이 시험 때문에 지체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종래의 계획을 수정했다. 1992년 말까지만 근무하고 사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절로 가서 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고시에는 만기 전역자에게 성적 5%를 가산해 주는 제도도 없으니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어 더욱 의욕이 넘쳤다. 이러던 2월 어느 날 퇴근 무렵에 석간신문이 문틈에 있는 것을 집어 든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것은 사법시험에 관한 제도개선 공청회 내용이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응시 자격을 법과대학 졸업자로 제한하자는데 의견을 함께하고, 이를 검토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독학으로 사시를 합격하자고 이제껏 별렀던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회가 사시합격자에 관하여 역경 속에서 독학으로 합격한 인간 승리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법과대학 교육을 받은 자를 원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학을 가야 했다.
대학을 가자!
바로 다음 날부터 검정고시 학원에 나갔다. 연말에 직장을 그만두자는 계획은 취소된 것이다. 학원은 6개월 과정이었다. 3년 과정을 위와 같은 단기간에 해치우는 것이기에 부담이 많았다. 무엇보다 퇴근 1시간 전에 시작하는 수업이어서, 직장에서 상사들의 눈치를 보며 퇴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놓고 이것저것 가릴 입장이 못 되었다. 일찍 퇴근할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수학책을 펴고, 까마득하게 잊혀진 수식을 익혀 나갔다. 통행금지 시간 무렵에야 학원에서 귀가하고, 새벽에는 대입학원에 나가 단과를 수강하고 출근했다. 이런 고된 생활로 인해 건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머니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로 쓰러지지 않고 감당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대입단과반과 직장, 야간학원 그리고 정독도서관을 오가며, 나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최선을 다하였다. 정성이 헛되지 않아 그해 8월에 있었던 시험에 합격하였다. 26세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몹시 기뻤다. 합격증을 받아온 그 날 밤 어머니에게 내일 직장을 사직할 것임을 말씀드렸다. 대학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으나 나의 봉급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상황에서는 무모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당장 생활비도 문제려니와 대학 다니는데 필요한 등록금 등의 학비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현실의 어려움과 타협하며 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나의 젊음과 목숨을 담보로 삼고 부딪혀 나가기로 했다. 결코 산 자는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며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실 것을 부탁하고, 다음 날 사표를 제출했다. 한 번의 재수를 한 다음, 28세가 되던 1984년에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법대생이 된 것이다.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한 경희캠퍼스이 봄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연의 봄이 아름다운 정취를 줄지라도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게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내 인생의 봄이 필요했다. 이 봄을 맞이하고자 늙은 프레시맨(freshman)은 도서관 구석진 곳에 고정석을 확보하고 재학 중 절대 합격을 목표로 민법총칙을 읽어 나갔다. 우리 집은 언제나 새벽 6시면 환갑이 넘으신 어머니는 공장으로, 형님은 리어카 행상으로, 나는 도서관을 향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모두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차비가 없어 답십리에서 1시간을 걸어 등교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숨 막힐 듯한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늦가을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깔린 새벽이었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누님댁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자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방에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채 방문이 열려 있었다. 어머니와 형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방세가 오를 때마다 달동네로 내몰리다가 드디어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어머니와 형님의 생명마저 빼앗긴 것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 석고상처럼 누워있는 두 시신은 가난의 제물이었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자!"며 새벽을 깨우던 분들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길에 접어든 것이었다. "형근이 네가 고시 붙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 내가 눈을 감고 죽지 못할 것 같다."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어머님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누워 계셨다. 나는 그분의 초점 잃은 두 눈을 쓸어내리며 말씀드렸다.
"어머니! 제가 고시 붙으면 울겠습니다. 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혹독한 가난에게 두 생명을 빼앗겼다는 패배감으로 나는 괴로워했다. 얼마나 마시고 피워댔는지 모른다. 틈만 나면 벽제 공동묘지로 달려가 눈 덮인 무덤에 고개를 파묻고 통곡했다. 못다 한 두 분의 몫까지 살기로 했다. 2학년이 되어 기숙사로 들어갔다. 이 무렵 한 선배의 소개로 UBF에 나가게 되었다. UBF는 대학생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배우도록 돕는 단체이다. 매주 한 번씩 하는 1대1 성경 공부는 슬픔과 고독 가운데 있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점차 알아가는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을 영접함으로써 기독교 인생관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도전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월산서원(月山書院)에서의 첫 고시원 생활은 긴장과 기대의 연속이었다. 식사 후 약수터 가는 것과 주일 날에 예배드리러 경희문 센터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비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는 것은 이상한 외로움을 동반했다. 저녁 식사 후 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시내의 야경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알 수 없는 고독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래도 심기일전이 필요했다. 친구 심수명이 나의 심경을 읽었다. 가까이 있던 한 아가씨를 소개시켰다. 신림동에서 광화문까지 만나러 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순간의 기쁨은 있었으나 점차 다가오는 28회 1차로 인하여 좌우간 결단이 필요했다. "내게는 사법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퉁명스러운 한마디 전화로 그동안의 관계를 정리하고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애써본 것과는 상관없이 불합격되었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으나 충격은 컸다. 몹시 우울한 심정으로 비를 맞으며 등용문에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착잡한 내면 가운데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은혜가 또렷이 새겨져 왔다. 불현듯 누군가에게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소원이 일었다. 그 즉시 도서관으로 가서 후배를 만났고, 이후 그 후배와 1대1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계기가 되었다. 4학년에 되자 29회 1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터였기에 각오가 새로웠다. 3개월을 남겨 두고부터는 4시간이 넘지 않은 수면을 취하면서 밀어붙였다. 그 해 1차는 몹시 쉬웠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해방감 이상의 환한 웃음이 가득한 모습들이었다. 나 역시 작년보다 잘 보았다. 그런데 예상 점수를 매겨보면서 당락을 점칠 때면 왠지 허전한 심정이 지배했다. 결과는 84점이 넘는 커트라인에 6문제 차이로 낙방하고 말았다.
하늘 아래서 혼자만 겪는 고통인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내 자신에게도 부끄러워 한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다. 그토록 사시의 벽이 두꺼운 줄 예전에 느끼지 못한 바였다. 텅 빈 마음을 부여잡고 무작정 걸었다.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수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내면 깊숙이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고통받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움터 왔다. 그분은 세상에서 나의 실패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의 음성으로 다가오셨다. 다시 몇몇 후배들을 초청하여 1대1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3학년 때처럼 온 마음으로 도울 수 없었다. 점점 다가오는 졸업식을 앞두고 심한 허탈감에 지배되었다. 재학 중 절대 합격의 목표는 물거품이 되고 졸업장 하나 들고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졸업한다는 사실 앞에 괴로워했다. 30회 1차가 임박함에도 방황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영적으로는 스피리트(Spirit)가 바닥에 닿았고, 공부량도 지난해와 별다를 게 없었다.
불안한 가운데 맞이한 시험에서 국제사법을 67.5를 맞는 데 그쳐 4문제 차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교 고시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제는 어디로 갈 곳도 없었다. 돈도 없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필경 내게 있어 사법시험은 젊은 혈기에 기초해서 한 번쯤 품어본 꿈에 불과해 보였다. 사법시험 때문에 바친 지난 시간의 수고와 노력을 그냥 헛되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평생 한을 품고 살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세상 떠난 두 분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가 다시 한번 기회를 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오갈 곳 없는 비천한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셨다. UBF 경희문 센터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초여름의 더위 속에서 배낭 가득히 책을 담아 나를 때는 지난날 천관산에 있는 탑산사로 어머니와 함께 오르던 시절의 기억을 새롭게 하였다. 센터에서 각종 모임에 쓰는 긴 테이블이 나의 침대가 되어 주었다. 따스한 훈기가 도는 아랫목이 없었어도 마음이 포근했다. 하나님의 종들이 주의 역사를 논하는 곳에서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 없이 지내시던 모습을 실제적으로 느끼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나아가 여러 목자님들의 배려 가운데 필요한 물질도 충당 받게 되어 멀어져 버린 듯한 사시에 다시 도전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먹고 자는 곳을 3번씩 옮겨 다녀야 했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내면속에서는 스피리트(Spirit)가 넘쳤다.
31회 1차를 앞두고 각오는 사뭇 대단했다. 어쩌면 장래의 진로가 걸려있는 한 번의 기회이기도 했다. 출제 가능한 문제를 메모하여 시험 하루 전날에 전부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 왔더라도 시험장에서 기억나지 않거나, 혼동하는 경우이면 무익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합격을 확신했다. 정작 될 것 같다는 예감은 컸지만 실패하면 겪게 될 고통 때문에 초조하게 보내며 2차를 준비하지 못했다. 1차 발표가 있기까지 2개월 동안 어음 수표법 정리를 하는 데 그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 기쁨이었다. 그런데 1차에만 매달려 오다 보니 2차 준비가 전무한 상태였다. 다시 새롭게 교재를 구입하여 읽어 나갔다. 그룹스터디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해 가을 내내 가장 이른 새벽에 중앙도서관에 나가는 열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트레스 해소라는 명목으로 극장을 자주 찾았다. 늦은 나이에 부모. 형제도 없이 홀로 지낸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33회 2차는 국민대에서 있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그런데 셋째 날 오후 민사소송법의 변론능력과 소송능력의 비교와 형성판결의 기판력 문제는 33회 시험과 인연이 없는 것임을 직감케 했다. 시험장을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찬송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래도 많은 나이와 더 이상은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합격을 수없이 기원했다. 발표 하루 전에 고시 연구사를 찾아갔다. 방금 입수한 합격자 명단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 곁에 다가서서 번호를 찾았다.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이젠 무얼 하나⋯." 고개를 처박고 종로통을 헤맸다. 사망 권세가 마음을 훔치고 불신과 패배감을 심으며 왕 노릇했다. 그리고 절망의 심연으로 마구 끌고 다녔다. 앞으로도 도저히 합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설 일이 아니었다. 아니 물러설 길도 없었다.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자에게 차선책이란 없다! 1차부터 다시 해야 하는 원점에 서버렸다. 그해 가을 10월 16일자 일기를 들춰본다.
어머니!
당신이 세상 떠난 지 벌써 7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의 만남은 괴로운 것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저의 마음속에 사무치는 당신께 향한 정 때문에 망설여집니다. 지금쯤은 백골로 변해 있을 당신의 생전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립습니다. 굵은 손마디가 저의 손을 덥석 잡을 때 따스한 체온이 마음을 녹이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따스한 당신의 손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고 생전에 느꼈던 온정은 당신의 심장 부위에 조금 남아있던 그 날 아침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은 이 가을에 지는 낙엽도, 푸르른 하늘도,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느끼지 못하고 무산되어 버린 2차를 안타까워하며 다시금 인생의 여정을 다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고난과 맞서 싸우는 기계와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펼 장래가 아니라, 죽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극한투쟁으로 변해버린 현실을 사랑하며, 슬프면 홀로 울고 외로우면 당신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렵니다.
5. 영광
법조인이 되려는 자로서 얼마간의 준비를 거쳐 자연스럽게 거쳐 가야 될 하나의 관문에 불과한 사법시험이 생의 존재 목적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음을 깨달을 때 두려움과 엄숙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수험생활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어찌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는 절대적인 방향을 잡았다. 생을 마치며 유언을 하듯 간절한 심정으로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힘과 지혜를 얻어 나갔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를 믿는 자의 내면에 살아 역사하시고, 그들을 통해 영광을 보시고자 하신다. 마음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1차를 준비했다. 33회 1차 시험은 몹시 어려웠다.
오후 과목에서는 문제를 푼다고 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찍는 작업이었다. 커트라인에서 한 문제를 더 맞아 합격했다. 이어 2차에서는 동시 패스를 노리고 준비해 온 터였기에 내심 기대 속에 응시했다. 그런데 행정법에서 큰 실수를 범했다. 작은 문제가 '직접강제(直接强制)'를 약술하라는 것이었는데, 행정대집행(行政代執行)을 적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이를 알고 침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어 그냥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행정법은 64점이었고 상법이 과락이었다. 행정법이 과락이라고 여기고 실의에 빠진 여파로 오후 상법에서 진짜 망쳐버린 셈이다. 역시 채점의 주체는 수험생이 아니었다. 약한 건강으로 고전을 거듭하며 하루를 보내듯 2차를 준비했다. 간단한 메모 겸 서브노트(Subnote)를 예상되는 곳에 끼워 넣는 작업을 전 과목에 걸쳐 완성하였다. 시험 하루 전날에 어떻게 하면 그 과목을 모두 볼 수 있을까 하는 데 최대의 관심을 쏟았다. 시험 두 달 전까지 기본 3법은 2회독, 그 외의 과목은 3회독을 정독으로 보았다. 왠지 합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자기 최면이 아닌가 경계도 하였지만 단순한 희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험장소가 한양대로 공고되었다. 첫날 아침에 고사장을 찾아 들어가는 순간 언젠가 한 번 와보았던 곳임을 직감했다. 14년 전 가장 말단인 9급 검찰직 시험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이 나라 최고의 시험인 사법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자리를 찾아 앉은 후 허물과 실패만을 거듭해 온 비천한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4일 동안 방(榜)이 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의 오랜 기도와 노력을 축복하고 계심을 느꼈다. 4일간은 이 시험을 위해서 겪었던 고통들을 4분 하여 다시 겪는 것과 같았다. 육체적인 피로가 심하여 시험이 끝나는 7월 3일 오후 4시가 내 생전에 도래할 것인가 의문시되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 시간은 돌아왔고, 앞으로는 고시 답안지를 메꿀 필요가 없음을 확신한 가운데 인연 서린 교실을 나왔다. 숨이 멎어 버릴듯한 발표날의 초조 속에서 분명한 합격을 확인했다. 이어 면접에서는 첫째날 헌법재판소 결정의 종류에 관한 질문이 있었고, 그다음 날은 그룹 토의로 "최루탄과 화염병"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간단히 발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6. 출발
하나님께서는 운명적인 환경 속에서 생계나 걱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순리적이었던 소년의 꿈을 귀하게 여기셨다. 돌이켜보면 사법시험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질투심 많은 사람과 유사하다. 나의 형편이나, 나이나, 반드시 합격해야만 하는 개인적인 모든 바램을 도외시한다. 오직 커트라인을 상회하는 점수를 얻은 자에게만 뜨거운 열정을 표시한다. 합격점을 얻는 데는 합격자 수만큼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스스로 터득되는 것이고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 한 번의 인생을 가치 있고 소신껏 살고자 택한 법조인이 되려는 문턱에서 온 젊음을 다 바쳤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온 것이 오늘의 나의 모습이다.
사법시험은 장래 전문직업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한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참된 의미와 방향을 설정하게 해 주었다. 지난 수험여정 가운데 동행하시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다(NO CROSS, NO CROWN)는 진리를 깨우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법조계로 보내신 뜻을 기억하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복음적인 법조인이요, 캠퍼스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오늘이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이름을 적어 영원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단 한 분이라도 누락될까 염려되어 생략하기로 한다. 수험생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합격을 기원하며, 대학 은사이신 박윤흔 교수님께서 행정법 모의고사 답안지 여백에 적어 주시고 격려하셨던 글로써 이 합격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책을 읽어서 우선 줄거리만 파악하십시오.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와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시연구 1993년 6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