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피해 뛰쳐나오자 회칼 든 살인마가…논현동 고시원, 그날의 비극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불길 피해 뛰쳐나오자 회칼 든 살인마가…논현동 고시원, 그날의 비극

2025. 08. 26 10:53 작성
손수형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h.son@lawtalknews.co.kr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4년간 치밀하게 범행 준비

16년째 미집행 사형수로 복역 중

2008년 10월 22일, 정모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강남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연합뉴스

타오르는 불길을 피해 복도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기다린 것은 50cm 회칼을 든 살인마였다. 2008년 10월 20일 아침,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에서 울린 화재경보기는 끔찍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범인은 그곳에서 5년 넘게 살아온 30대 남성 정모 씨. 25일 방송된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방 침대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화마를 피해 뛰쳐나오는 이웃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6명이 숨지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옥으로 변한 고시원 복도

사건 당일 오전 8시 15분, 정씨가 지른 불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좁은 고시원 복도를 집어삼켰다. 대부분 새벽 근무를 마치고 잠들어 있던 투숙객들은 연기에 놀라 황급히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복도에는 검은 옷과 모자,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정씨가 서 있었다.


첫 희생자는 중국에 있는 아들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한국에서 하루 13시간씩 일하던 재중동포 여성이었다. 정씨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는 여성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불을 끄려 소화기를 들었던 20대 취업준비생도, 가족 몰래 학비를 벌던 20대 여대생을 구하려던 40대 여성도 그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범행은 특정인을 노린 원한 관계가 아닌,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묻지마 살인'이었다.


정씨는 범행 후 피해자인 척 소방대원들에게 구조됐지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수상히 여긴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4년간 준비한 범행

고시원 정씨의 방에서 발견된 일기장 모습. 신변을 비관하고 세상을 증오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연합뉴스
고시원 정씨의 방에서 발견된 일기장 모습. 신변을 비관하고 세상을 증오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연합뉴스


정씨의 범행은 우발적인 분노 표출이 아니었다. 그는 무려 4년 전부터 범행을 계획하고 준비해왔다. 2004년부터 회칼과 가스분사기, 기름 등을 차례로 사들였고, 범행 당일에는 연기를 대비한 소형 플래시까지 소지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의 방에서는 처지를 비관하는 내용이 담긴 일기장 4권이 발견됐다. 일기장에는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자책과 함께 "조국은 나를 버렸다. 이젠 필사의 항쟁뿐이다"라는 등 세상을 향한 극단적인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고시원비와 휴대전화 요금, 벌금을 낼 돈도 없어 ‘이렇게 살면 뭐 하나’ 하는 생각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사형 선고받았지만…

정씨는 재판 과정에서 우울증으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고, 진지한 참회를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2009년 5월, 법원은 정씨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고,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다. 정씨는 2025년 현재까지 57명의 미집행 사형수 중 한 명으로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피해자 유족들은 "내 가족을 죽인 범인이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자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한편, 유족들은 고시원 주인과 서울시를 상대로 소방시설 미비 등을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고시원이 소방 기준을 모두 통과했고, 범인의 고의적 불법행위를 예견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시원의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고 복도 폭 기준이 강화되는 등 뒤늦은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나만 모르는 일상 법률 상식, 매일 아침 배달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