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2대 들이받고 도망간 운전자⋯"사고 몰랐다" 주장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건 뇌전증 때문
차 2대 들이받고 도망간 운전자⋯"사고 몰랐다" 주장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건 뇌전증 때문
뺑소니 사고 내고서 "무슨 사고가 났느냐"며 반문한 운전자
재판에 넘겨진 후 '뇌전증'으로 인한 기억상실 주장

뺑소니 낸 운전자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셔터스톡
연쇄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운전자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것이 확인돼, 일시적인 기억 소실로 인해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인정된 것이다. 뇌전증은 발작과 기억상실증을 일으키는 뇌질환이다.
지난 5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변민선 부장판사는 교통사고 후 미(未)조치를 이유로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를 받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지난 2018년 9월, 서울 서초구에서 운전을 하던 중 차선을 변경하다가 다른 차량 두 대를 연이어 들이받고 도주한 혐의를 받았다. 사고는 가벼운 접촉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피해 차량의 운전자들은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 차량 수리비는 약 200만원이 나왔다.
하지만 사고를 낸 A씨의 태도는 이상했다. 그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무슨 사고가 났냐"며 사고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항변에도 사고 발생의 원인이 A씨인 것은 명백한 상황. 그렇다면 재판부는 어떤 근거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걸까.
A씨는 자신이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고가 난 줄 몰랐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에 도주할 의도도 없었다는 주장도 했다.
실제로 A씨는 앞서 2016년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남편 역시 A씨에게 기억상실증이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이런 점들을 종합한 결과 "몰랐다"는 A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고 당시 음주운전·무면허도 아니었다"며 "형사처벌을 받을 염려가 없는 피고인이 당시 통행 차량이 많아 도주가 어렵고, 도주하더라도 잡힐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기억 소실 외 사고 현장을 이탈한 원인을 찾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사고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A씨가 거짓말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사실도 이번 판결에 고려됐다.
뇌전증을 앓는 사람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지 못한다. 우리 도로교통법(제82조 제1항 제2호)은 "교통상의 위험과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정신질환자 또는 뇌전증 환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은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미 운전면허를 취득한 사람에게 뇌전증이 발병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다. 해당 사실을 도로교통공단에 자진해서 알리지 않는 한 공단이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도 없다.
운전면허 발급과 갱신을 담당하고 있는 도로교통공단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단 관계자는 6일 로톡뉴스와의 통화에서 "기존에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병이 후에 발생됐을 때는 알리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 의료진이 공단으로 통보할 수 있도록 그렇게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6년 해운대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여 24명의 사상자를 냈던 사고 당시에도 지적됐던 사항이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것은 문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뇌전증으로 진료 받은 환자는 13만명이 넘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았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변호사들은 "업무상 과실치상이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내가 뇌전증을 앓고 있지만 교통사고를 낼 것 같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사고를 냈다면 과실에 의한 교통사고, 즉 업무상 과실치상이 적용될 것이라는 취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