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8)] 사내놈들은 별거 없어!
[정형근 교수 에세이 (8)] 사내놈들은 별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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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년 12월 2일자에 “착오 없게 주의해달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 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민주화의 봄 1980년을 기대로 맞이하지만, 무서운 신군부 정권 시대가 연장되고 있었다. “선진조국 창조” 표어가 도로의 육교마다 붙여졌다. 국가권력이 흘러넘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보안 점검을 한다고 검찰청의 여러 사무실을 방문하곤 했다. 정보부 직원 두 명이 검은 007가방을 들고 내가 근무 중인 기록관리과로 왔다. 과장실에서 종일 머물면서 이런저런 온갖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
기록관리과에는 정보부가 챙겨 볼 비밀 관련 보안자료도 없었다. 그들은 간첩 등 공안사건의 증거물 처리를 어떻게 하였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왜, 이 서류를 피고인에게 돌려주었나요?” “무죄판결이 선고되면 증거로 압수한 물품은 제출했던 본인에게 반환합니다.” 뻔한 일상적 업무를 계속 설명해 주어야 했다. 압수물처리 업무를 전혀 모르는 그들에게 형사소송법을 비롯한 처분의 근거로 삼는 법령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 때문에 직원들은 일상적인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되어 매우 귀찮아했다. 그리고 정보부의 감독을 받는 것에 비위가 상했다. 과장님은 과거 검사실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수많은 대공 사건을 수사했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목에 힘주고 있는 정보부 직원들의 기를 죽이곤 했다.

중앙정보부 로고. /인터넷 캡처
그런 후에는 과장님은 “요즘 보기 드문 재미있는 그림이 있으니까 함께 봅시다!”면서 사무실 안에 있는 압수물 창고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최근 경찰에서 압수하여 송치한 음란 비디오 몇 편을 돌려주었다. 음란 비디오 테이프는 그 당시 시중에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요상스런 장면과 신음소리에 흠뻑 취한 정보부 직원들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창고를 나왔다. 그러면서도 무안하였던지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사무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당당하게 사무실을 들어올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과장님의 탁월한 수완에 저마다 존경을 표했다. 그러자 과장님은 한마디 하였다. “사내놈들은 별거 없어!” “자, 다들 퇴근합시다”하면서 사무실을 나가셨다.
언젠가 퇴근 무렵에 서울지검에서 검사직무대리를 하는 사법 연수생들 대여섯 명이 우리 사무실에 왔다. 그리고 계장에게 음란 비디오를 좀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자기들도 민망한지 매우 어색한 웃음기를 띠기도 했다. 그 말은 들은 계장은 “직무와 관련 없이 사적으로 증거물을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시보님들이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차갑게 대꾸했다.
1980년 12월 초순경 과장님이 희한한 지시사항을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앞으로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성(姓)을 표기할 때, 온전할 전(全)이라는 한자의 윗변을 들입(入) 자를 쓰지 말고 사람 인(人)자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 인(人)자 아래 임금 왕(王)을 쓰면 옥편에도 없는 한자가 되는 셈이다.
경향신문 1980년 12월 2일자에 “착오 없게 주의해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총무처는 2일 정부 각 부처와 중앙선관위, 입법회의, 법원행정처 등에 공문을 보내 앞으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성(姓)을 표기할 때 「王」 자 위에 「入」자를 쓰지 말고 「人」자를 쓰도록 시달。이 공문은 특히 『착오 없도록 주의해달라』고 당부。총무처 당국자는 「이 같은 조치는 김용휴 총무처 장관이 지난달 말 출국 전에 청와대를 다녀와 실무자에게 지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러나 全 대통령은 항상 한글로 사인을 하기 때문에 全으로 표기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부언.
전두환이 “사람 중의 임금 곧 왕”이라는 의미였다. 주권자인 국민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권력자들의 한심한 짓이었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2년 12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국으로 출국하여 지병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옥중서신의 서두 “전두환 대통령 각하”라고 한문으로 쓴 성 부분의 글자가 사람 인(人) 변에 임금 왕(王)자로 되어 있다. 박정희는 20년 가까이 집권했는데, 도대체 전두환은 몇십 년, 몇백 년을 해 먹겠다고 한자 성까지 바꾸는지 불안해졌다.
그렇게 어두운 군사정권 상황 속에서도 내 갈 길은 가야 했다. 1981년경 7급 검찰사무직 시험에 국어 과목이 추가되었다. 고등학교 수준으로 출제된다고 하였지만, 중학교만 나온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다. 일단 무슨 책으로 공부해야 할지를 몰랐다. 특별히 고문(古文) 부분은 참 어려웠다. 고문에서 왜 15세기를 기준으로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무시간에도 짬을 내서 7급 검찰직 준비를 위하여 책을 봤다. 7급은 선발인원이 2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당시 모든 공무원 시험에서는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자에게 5%의 가산점을 부여했다. 단기사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나는 가산점을 받을 수 없어 매우 불리하였다. 주변에서는 현역 복무자가 아니면 합격하기 어렵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여건을 탓하며 도전을 멈출 수도 없었다. 사무실에서도 필요한 업무를 처리한 후에는 책을 펴놓고 공부했다. 궁금한 사항은 사무실에 업무차 들른 변호사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사무실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도 시험 준비를 했다. 어떤 분은 야간 대학 법대에 입학 후에 행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사직하기도 하였다.
강남에서 살던 계장은 출근 순간부터 돈놀이(대부업)에 여념이 없었다. “자네 회사를 내가 어떻게 믿고 돈을 빌려주겠어? 자네 이름으로 차용증을 쓰라고!” 이처럼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갚으라는 독촉통화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민법을 몰랐던 나는 왜 회사 명의로 돈을 빌려준다고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사무실에서 근무시간에도 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과장님이 늘 나에게 “정형근 씨는 젊으니까, 여기서 머물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검사가 되도록 하시오”라고 격려해 준 덕분이었다. 평생을 검사의 보조자 지위로 살아온 과장님의 회한 같기도 했다. 결제 서류판을 들고 과장실에 들어가면, “오늘 공부는 다했소?”라고 묻곤 하셨다. 하루는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조퇴를 하겠다고 했다. 과장님은 주머니에서 돈 천원을 꺼내서 주면서 “이 돈으로 소의 생간을 반 근 사다가 먹으면 원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돈 받기를 거듭 사양하자 “아, 빨리 받아! 이놈아!” 도리어 호통을 쳤다. 귀가하는 길에 마장동에서 그 돈으로 소고기 간을 사 왔다. 일요일에도 청사 사무실에 나와서 공부하려고 전철을 타고 오다가 도저히 서 있기도 힘들어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더위가 심한 한여름에 동대문 근처에 있는 어느 중학교에서 7급 검찰사무직 시험을 보았다. 교실이 따가운 여름 햇살로 너무 더워서 윗옷을 벗고 러닝셔츠만 입고 시험을 봤다. 교실에 선풍기도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관이 이를 허용하였다. 국어 과목에 “초인철학(超人哲學)을 주장한 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지문에는 ‘니체’도 있었지만, 나는 ‘칸트’를 정답으로 골랐다. 저런 문제가 국어시험에 출제된 것도 이상했다. 시험을 마치고 함께 시험을 보았던, 같은 사무실의 직원과 생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 분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학군단을 거쳐 중위로 군 복무를 마치고 검찰 서기보로 임용되어 들어왔다.
우리는 시험장 근처의 맥줏집에서 점심 무렵부터 오후 늦게까지 많이 마시면서 기출 문제를 기억해 내면서 정답을 서로 맞춰보았다. 그러던 중에 초인철학을 주장한 자는 칸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건 수험생에게 거저 주는 아주 쉬운 문제라는 것도 들었다. 고교 졸업자라면 누구나 맞출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기가 죽었다. 오후 늦게 그와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이 가까워 올수록 술기운에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열심히 해도 그 보람을 찾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깊은 절망감을 가누기 힘들었다. 시험을 보고 온 아들이 우는 것을 본 어머니는 “내가 너를 가르치지 못해 고생을 시킨다”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형님은 이런 나를 보고서 “세상일이 그리 쉽다냐!”고 위로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