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신뢰 깬 가락시장 '낙찰계' 비극⋯ 30억 들고 사라진 '해결사' 계주
40년 신뢰 깬 가락시장 '낙찰계' 비극⋯ 30억 들고 사라진 '해결사' 계주
피해 상인 100명, 피해액 최대 30억 추산
잠적한 계주 강씨, 변호사 선임해 "사기 아니다" 부인

서울 송파구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관계자들이 경매를 위해 배추를 옮기는 모습. /연합뉴스
"딸 결혼식 전세 보증금으로 주려고 모은 돈인데⋯ 제발 그 돈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울부짖고 계십니다."
서울 가락시장에서 20년째 식자재 납품업체를 운영하는 김영찬 씨(피해상인 대표)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려 40년 가까이 가락시장 상인들의 든든한 경제 공동체 역할을 해왔던 계가 하루아침에 공포의 대상이 됐다. 시장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결해주던 '해결사' 계주가 상인들의 피 같은 돈 수십억 원을 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부모부터 이어진 '신뢰' 대물림⋯ 배신의 서막
이 사건은 단순히 아는 사람끼리의 금전 사고가 아니다. 가락시장 안에서 이 계는 일종의 '두레'이자 '은행'이었다. 사라진 계주 강 씨(69년생 여성)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정직하게 운영해온 계를 20여 년 전 물려받았다.
김영찬 씨는 1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강 씨를 "되게 착실했고, 어르신들 공과금도 대신 내드리고 은행 업무도 봐주던 삶의 일부 같은 존재"로 기억했다. 시장 상인들은 은행 대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목돈을 마련하는 강 씨의 계를 철석같이 믿었다.
치밀했던 잠적⋯ "프사 지우고 아들 결혼시킨 뒤 사라져"
이상 징후는 3년 전부터 조금씩 나타났다. 신뢰가 생명인 계에서 곗돈 지급 날짜를 며칠씩 미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26일, 강 씨는 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 씨는 "연락이 안 돼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봤더니 자식 사진까지 다 지워지고 딱 한 장만 남았더라"며 "주변 정리를 다 하고 도망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강 씨는 잠적 두 달 전 아들의 결혼식까지 치른 것으로 알려져 상인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사기 아니다" 주장하는 잠적 계주⋯ 성립 가능성은
현재 경찰에 접수된 고소장 기준 피해액은 15억 원이지만, 김 씨는 고소하지 않은 피해자까지 합치면 피해 규모가 3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개인이 입은 최대 피해액은 1억 9천만 원에 이른다.
가장 의아한 대목은 잠적한 강 씨의 태도다. 강 씨는 고소 일주일 만에 상인들에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단체 문자를 보낸 뒤, 변호사를 선임해 "사기가 아니다"라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주가 곗돈을 들고 잠적하면 형법상 사기죄 혹은 배임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번 사안처럼 곗돈 지급을 미루며 주변을 정리한 정황이 있다면, 처음부터 돈을 가로챌 의사가 있었다고 판단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강 씨 측은 "돈을 돌려줄 노력을 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사 처벌을 피하려는 전략을 쓰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말의 양심 있다면⋯ 딸 돈만은 돌려달라"
피해 상인들은 자책감에 빠져있다. "우리가 너무 시장 안에 갇혀서 멍청하게 산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원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김영찬 씨는 강 씨를 향해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잠 못 자고 밤새 무거운 야채 배달해가며 모은 피 같은 돈입니다. 다는 못 돌려주더라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계신 그분의 딸 전세 보증금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사람이라면 돌아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