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34)] 서울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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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34)] 서울을 떠나자!

2021. 06. 09 10:43 작성2021. 06. 09 10:44 수정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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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차 안에서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새로운 날들을 기대하면서 붉은 태양처럼 빛나는 생활을 다짐했다. /셔터스톡

고시 공부 시절에는 사법시험에만 합격하면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실제로 변호사가 된 후에 시간을 들여서 교회 생활에 열성을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상에 대한 기쁨이 사라져갔다.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려고 모였을 때는 주로 정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초저녁에 모여서 밤 9시가 넘을 때까지 정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후에 성경 공부를 하려면 피곤하기도 하고 관심도 떨어졌다.


그리고 목회자가 아닌 직장 생활을 하는 평신도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곤 했다. 그에 관련된 책을 읽고 발표를 하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십일조에 대하여 그 성경적 의미 등에 관한 주제로 밤늦은 시간까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에 모임은 메말라 갔다. 복음에 대한 열정도 식어갔다.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가는데, 신앙생활은 위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중에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97년 12월에 대한민국이 부도날 것 같은 외환위기가 발생하였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금융감독원에 다니던 친구는 "이제 한국경제는 희망이 없다"고 비관적인 전망도 하였다. 이때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에 맞춰서 나 역시 집에 있던 금붙이들을 전부 내놓기도 하였다. 아이들 돌 반지까지 전부 내놓아 버려서 기념될만한 것이 집안에 없는 것을 알고서 나중에 다소 아쉬움도 들었다. 온 사회를 감싸는 불안과 기업들이 부도가 나서 망하고 근로자들이 실직하는 일이 속출하는 소식이 주변에 가득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내 마음 안에도 파고들었다.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내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했다.


실제로 달갑지 않은 일이 생겼다. 1998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법률사무소를 나에게 빌려준 선배님이 구청장 선거에서 낙선한 것이다. 그분은 이제 자연스럽게 변호사로 복귀할 것이 예상되었고, 나는 다시 새로운 사무소를 구해야 할 거 같았다. 이제 어디에 사무소를 열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어느 날 일찍 법정에 나가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변호사가 가까이 왔다. 내 옆에 기록이 가득 담긴 가방을 놓으신 후 말을 건넸다.


"요즘 변호사 수임료가 얼마나 되나요?"


본인도 변호사를 하면서 수임료를 묻는 게 다소 의아했다.


"글쎄요. 보통 300만원은 기본으로 받는 거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가 10년 전인 1988년에 퇴직한 후 개업을 했는데, 그때도 300만원을 받던 것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네요"라고 말했다.


수임료가 해가 갈수록 올라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300만원도 정말 큰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호사 수임료를 얼마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IMF 후에 1999년에 변호사와 세무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행정사, 관세사, 건축사, 수의사, 공인노무사의 보수를 해당 단체에서 일률적으로 정하여 왔던 보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때부터 대한변협은 변호사들의 수임료 약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법무사단체는 강력한 입법 로비로 법무사의 보수는 "대한법무사협회 회칙으로 정한다"는 규정을 존치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변호사 수임료를 비롯한 전문자격사의 보수는 부르는 게 값이 되었고, 보수가 대폭 인상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전문자격사의 문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의뢰인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갖는 대형로펌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단 한 건을 수임하는 것이 급한 상황에 처한 자는 매우 낮은 보수라도 받고 업무를 해야 하는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천관산 탑산사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온 후 변호사가 되어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법률사무소도 이제 주인에게 넘겨주어야 할 형편이라서, 내가 원하는 책상과 소파 등 집기들을 구입하여 어엿한 사무실을 꾸리고 싶었다. 새로운 개업 욕심과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제는 교회 생활도 그만두고, 복잡한 서울 도회지 삶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었다. 한적인 논두렁을 거닐면서 바다낚시를 하면서 조용히 지내면 좋을 거 같았다. 장흥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자랐기에 법원이 있는 장흥지원 부근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장흥은 변호사 한 명도 없는 무변촌이라서 혼자 그곳에서 개업하기가 꺼려졌다. 변호사도 동료들이 곁에 있어야 교류도 하고 정보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무소를 해남으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이런 결정을 하면서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정말 즉흥적으로 "아! 이제는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라는 충동적인 마음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서울 생활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 결정을 하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과연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를 놓고 기도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20세에 중졸 학력으로 맨손으로 상경하여 대학을 나오고 고시 붙어서 변호사가 되었으니 금의환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뭔가 결정을 하면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성격이라서, 며칠 후에 전남 해남에 내려갔다. 해남 읍내를 다니면서 법률사무소로 사용할 비어있는 건물을 찾아봤다. 그런데 사무소로 쓸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여인숙으로 사용하다가 비어있던 공간을 사무소로 고치기로 하였다. 그렇게 임대차계약을 해놓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왠지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버스 차창 밖으로 유난히 붉은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새로운 날들을 기대하면서 붉은 태양처럼 빛나는 생활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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