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까지 스며든 챗GPT…사기 미끼부터 증거까지, 판결문에 등장한 AI
법정까지 스며든 챗GPT…사기 미끼부터 증거까지, 판결문에 등장한 AI
사기 수법부터 학폭 별명, 노동 차별 증거까지
판결문 속 챗GPT의 네 가지 얼굴

챗GPT가 판결문에 등장했다. 사기 수단, 학교폭력, 법적 증거, 노동 차별 입증 근거까지 네 가지 모습으로 법정에 섰다. /셔터스톡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던 인공지능 '챗GPT'가 뜻밖의 모습으로 판결문에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술 도구를 넘어, 범죄 수단, 법적 증거, 심지어 학교 폭력 낙인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최근 2년간 '챗GPT' 혹은 'chatgpt'가 언급된 판결문을 통해, AI의 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① 신종 사기 수법 조연으로 등장
"사이트에 가입해서 숙소를 예약하면, 챗GPT가 후기를 작성해 줄 겁니다. 원금과 수수료는 바로 돌려드립니다."
2024년 11월 인천지방법원의 한 사기 사건 판결문에는 챗GPT를 이용한 신종 아르바이트 사기 수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범죄 조직은 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숙소 예약 후기 작성 아르바이트"라며 피해자들을 유인했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그럴싸했다. 피해자가 돈을 입금해 지정된 숙소를 예약하면, 복잡하게 후기를 쓸 필요 없이 챗GPT가 후기를 작성해주고, 곧바로 원금과 1~3%의 수수료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첨단 기술인 챗GPT를 언급하며 피해자들을 안심시킨 범죄 조직은 처음 한두 번은 실제로 원금과 수수료를 지급하며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이내 더 큰 금액의 예약을 유도한 뒤, 거액의 돈이 입금되자 그대로 잠적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이 사건에서 피고인 A씨는 사기 행위에 직접 가담한 증거가 없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판결문을 통해 챗GPT가 범죄 조직의 기망 행위에 어떻게 '조연'으로 활용되었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2024고단3409 판결).
② "야, 챗GPT" 학교폭력 낙인이 된 AI
"A는 ChatGPT와 참가인의 이름을 합친 별명이다."
2024년,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열린 한 학교폭력 사건 판결문에는 AI가 10대들의 관계에 어떻게 상처를 남기는지 드러났다. 가해 학생들은 피해 학생에게 그의 이름과 '챗GPT'를 합성한 조롱 섞인 별명을 지속적으로 불렀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별명에는 "인공지능 챗봇(ChatGPT)을 사용하여 부정하게 과제를 수행하였다는 취지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친구를 놀리는 장난을 넘어, '너는 정직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능력 없이 과제를 해결한다'는 식의 비난과 낙인을 찍는 행위였다.
법원은 "불법사이트나 인공지능 챗봇을 사용했다는 취지의 별명은 참가인을 얕잡아 낮추어 부르는 내용"이라며 명백한 언어폭력이자 학교폭력이라고 판단했지만, 절차적 하자로 인해 징계 처분을 취소했다(2023구합14560 판결).
③ 챗GPT 답변은 증거 안 돼
법정 다툼에서 챗GPT가 증거로 제출되는 일도 있었다.
2024년 10월 특허법원에서는 미국의 유명 날씨 정보 회사 '웨더 채널(The Weather Channel)'이 자사 상표를 국내에 등록하려 하면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특허청은 "날씨 채널이라는 이름은 상품의 용도를 설명하는 기술적 표장에 해당해 특정인에게 독점권을 줄 수 없다"며 등록을 거절했다.
이에 불복한 회사는 행정소송을 내면서 새로운 증거를 제출했다. 바로 챗GPT와의 대화 내용이었다. 회사는 챗GPT에 "'The Weather Channel'은 한국에서 식별력이 있는 상표인가요?"라고 질문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이를 증거로 낸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단호했다. 법원은 챗GPT의 답변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GPT는 사전에 학습된 트랜스포머 모델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생성해 대화를 나누는 인공지능으로서 편향성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
재판부는 챗GPT가 가진 내재적 한계를 정확히 짚으며, 그 답변만으로는 상표가 국내에서 식별력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2024허11521 판결)
④ "똑같이 챗GPT 교육받았잖아요" 비정규직 차별 입증
반면, 챗GPT가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데 뜻밖의 조력자가 된 사례도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립대학법인 소속 비정규직 직원들이 정규직과의 임금 차별을 다툰 소송에서 직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직원들은 정규직과 동일한 가치의 노동을 하고도 수당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때 증거 중 하나로 제출된 것이 바로 '챗GPT를 활용한 업무생산성 향상교육' 안내 공문이었다.
대학 측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직원에게 동일한 챗GPT 활용 교육을 공지한 사실이, 역설적으로 두 집단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 것이다.
법정에 등장한 챗GPT의 네 가지 얼굴은 기술 발전이 우리 사회와 법률 시스템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법원은 이제 막 AI라는 낯선 변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참고]
인천지방법원 2023고단9970, 2024고단2279, 3409(각 병합) 판결문 (2024. 11. 21. 선고)
의정부지방법원 2023구합14560 판결문 (2024. 2. 13. 선고)
특허법원 2024허11521 판결문 (2024. 10. 31. 선고)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나64678 판결문 (2025. 2. 18.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