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3)] 5·18을 앞둔 밤, 심야 기관장 회의
[정형근 교수 에세이 (3)] 5·18을 앞둔 밤, 심야 기관장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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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편집자 주-
법조와 법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경희대 로스쿨 정형근 교수가 지나 온 감동의 라이프 스토리를 연재로 전한다.
또래 아이들이 등교할 때 그는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으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된다. 만학도로서 법대 진학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그해에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깊은 비탄을 안고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36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원을 충원하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된다. 그는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검찰청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 보름 만에 처음으로 당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직신고를 하려고 사무국장실로 갔다. 국장님은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는 엄중한 상황이고, 토요일이라 평소보다 무척 바쁠 것이라면서 근무를 잘하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시해된 후부터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였다. 당직은 검사, 계장, 그리고 직원 2명이 근무를 한다.
토요일 당직은 오전 근무를 마친 오후 1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한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당직실에 갔더니, 많은 전화기가 먼저 눈에 띄었다. 책상 위에 시꺼먼 전화기가 20대 가량 있었다.
벨이 동시에 울릴 때는 어떤 수화기를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임 직원은 상급기관에서 걸려온 전화부터 받아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자정이 지난 후에는 부산시 경찰국 교환원을 통해서만 대검찰청 등과 연락이 된다고 했다.
전화 받는 일은 전적으로 내 업무였다. 저녁식사를 김치찌개로 주문하여 당직실에서 먹는데, 검사는 몇 숟갈 뜨더니 맛이 없다고 수저를 놓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에 모든 사무실에 들어가 캐비닛이 잘 잠겨 있는지를 확인하는 보안점검을 해야 했다. 당직실 한쪽에 보관된 열쇠를 전부 상자에 담았다.
그런 나를 본 계장은 “언젠가 중앙정보부 직원이 심야에 공안부 검사실에 몰래 들어가 ‘공안사건 기록을 잠기지 않은 캐비닛에 두었다’면서 난리 친 일이 있었으니, 꼼꼼하게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1층에 있는 사무과를 시작으로 맨 꼭대기 층까지 청사 전체를 돌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린다. 컴컴한 검사실 출입문을 열고 불을 켜면, 제일 먼저 검사의 책상에 놓인 명패가 보인다. 검은 자개로 된 고급 명패가 형광 불빛에 유난히 번들거린다. 명패 양 끝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 문양이 그 권위를 한층 더해준다.
붉은 방석이 놓인 커다란 의자는 아무나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 같다. 그렇게 검사의 책상 앞에 물끄러미 서서 “누구는 대학 나와서 검사하는데,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해서 이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치밀어온다.
그러다가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자!”며 마음을 다독인다. 여러 검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캐비닛의 손잡이를 당겨보는 것으로 잠금 상태를 신속하게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한 시간 정도 점검을 마치고 당직실에 돌아오자, 나를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부산지역 계엄사령부라면서 긴급전통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 전화는 처음이라서 계장에게 “계엄사에서 전통 보낸다고 하는데요.”라고 전했다.
계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그냥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으세요.”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처음 받는 전화통신문이라서 상대방이 “분류기호”라고 했는데, 긴장한 나는 그게 뭔지 모르고 “분류교”라고 기재하기도 했다.
긴급전통의 내용은 1980년 5월 17일 밤 11시에 계엄사에서 부산지역 기관장 회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 참석대상자는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시 경찰국장,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부산지구 헌병사령관이었다.
휘갈겨 쓴 전통문을 다시 한 번 보았더니, 회의 일시, 장소와 참석대상자만 있고 가장 중요한 '회의 안건'이 없었다. 말은 회의참석이지만, 사실상 밤 11시까지 계엄사로 출석하라는 소환통지와 다름없었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토요일 밤에 이유도 밝히지 않고, 전화 한통으로 부산에서 힘깨나 쓴다는 권력기관의 장들을 소집시키고 있었다. 계장에게 전통문을 건네주었더니, 한순간에 쭉 읽더니 빨리 검사장님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가 저녁 식사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급히 검사장의 소재파악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과 기관에 전화를 돌렸다.
한참 후에 검사장은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울산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야간에 개최될 회의 일정도 보고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당직실에 벨이 울렸다. 전화기 앞에 앉아 관내 경찰에서 하는 사건발생 보고서를 받아쓰고 있던 내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부산지검 당직실입니다.”라고 했더니, 검사장이라고 말했다. 검사장은 회의 참석대상자가 누군지를 물었다. 검사나 계장에게 전화를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즉시 대답을 해야 했다.
“네, 검사장님과 시경국장, 중정 부산지부장, 부산 헌병사령관입니다.” 그러자 다시 “누구라고?” 물었다. 서너 번을 말씀드렸는데도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안타깝게도 시종 반말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놓자, 계장이 검사장님이시냐고 물었다. 나는 "검사장님이라고 하시네요." 라고 애매하게 답했다. 사실 통화한 분이 검사장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검사장을 직접 뵙거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사장이 처음 발령받아 온 직원의 신고를 받을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튼 통화가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울산에서 부산으로 오셨는지는 여쭤보지도 못했다.
그로부터 30분가량이 지났을 때, 검사장이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당직 검사를 바꾸라고 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검사는 내가 조금 전에 검사장에게 보고 드렸던 회의 참석대상자를 반복하여 말씀드리고 있었다.
그런 통화를 들으면서, 회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회의 참석대상자만 파악하고 있는 것이 답답했다. 서면으로 보고서를 올리면 좋았겠지만, 그럴 필요성은 생각도 못했다.
한참 후에 다시 벨이 울렸다. 또 검사장이었다. 검사에게 수화기를 돌렸더니 “아무래도 계엄사로 납치당할 것이 염려되니까, 차장검사를 대신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 밤중에 차장검사를 불러야 하나 난감했다. 심야에 회의를 한다고 불러 모으니까, 납치당할 걱정을 한 것 같았다. 형사소송법을 공부할 때 배웠던 막강한 검사의 기개는 간데없고, 그 날 밤은 내 한 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뿐이었다.
결국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검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지침에 따라, 시국사범에 대한 구속영장을 무더기로 청구하는 것밖에 없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당시 그런 사건처리로 정신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검사장이 회의 장소로 들어가셨다는 전갈이었다. 드디어 검사장이 회의에 참석한 것을 확인하고, 대검찰청에서 어떤 지시가 떨어질까 긴장상태로 있었다.
당직실에서 검사를 비롯한 당직 근무자들이 말없이 TV를 보고 있었다. 당직 검사는 보통 자기 방(검사실)에 있다가 밤 10시경에 퇴근을 하고, 지시할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는데, 그 날은 밤늦도록 퇴근을 못하고 당직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되는 순간 TV에서 “전국 비상계엄 확대실시(제주도 포함)” 자막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비상계엄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계엄령을 철폐하라는 국민의 요구가 엄청나게 큰 마당에, 오히려 그 반대로 전국으로 확대 조치를 하고 나서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백주대낮에 계엄군이 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니, 정말 무서울 것이 없는 정치군인들 세상이었다. 아까부터 왜 심야에 회의를 하나 궁금했는데, 바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알게 했다. 그러면 부산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같은 시간에 개최되었을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회의를 마치고 나온 검사장이었다. 검사를 바꾸라고 했다. 약간 상기되고 긴장된 목소리였다. 통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뭐라 하십니까?” 계장이 검사에게 물었다. 별말씀 없었다고 대꾸한 검사는 그제야 퇴근했다. 그러면서 늦은 시간이라도 연락사항이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하면서 청사를 나갔다.
그 후에는 경찰에서 변사사건 등의 보고로 밤새 울려대던 전화도 조용해졌다. 사방이 고요해지니까 알 수 없는 불안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일 날이 밝으면 세상이 어찌 변하나 두려운 생각이 오갔다. 동이 틀 때까지 소파에 앉아 꼬박 밤을 샜다.
일요일 아침이 되자, 주간 당직 근무자가 출근했다. 간밤의 근무사항을 인계하고 하숙집으로 퇴근했다. 그 날 아침에도 도로변에는 무장한 계엄군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던 부산대학교 의대생 2명이 나를 보자마자 “전남대에서 데모가 크게 벌어졌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매우 흥분된 상태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전부 모이기로 했다고 하면서, 그 두 학생은 급히 하숙집을 빠져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