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안전’ 협조 요청 외면한 선거 현수막…사고 나면 정당·후보자가 배상 책임 다 진다
‘시민 안전’ 협조 요청 외면한 선거 현수막…사고 나면 정당·후보자가 배상 책임 다 진다
최소한의 안전조치조차 거부
법원, 민사상 ‘공작물 책임’ 엄격 적용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6·3 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 거리에 난립하는 선거 현수막이 안전조치 미비로 사고를 유발할 경우, 이를 설치한 정당과 후보자가 무거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된다.
특히 정부가 각 정당에 ‘현수막 바람구멍(통풍구) 설치’를 비롯한 구체적인 안전 지침을 수차례 요구했으나 정치권이 이를 모두 묵살한 사실이 경향신문 단독 보도를 통해 드러나면서, 법조계에서는 이러한 가이드라인 무시 행위가 향후 소송에서 치명적인 설치상의 과실로 작용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행안부 공문 세 차례 보냈지만…정치권 ‘외면’ 속 강풍 전도 사고 발생
경향신문 단독 보도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올해 2월과 4월 등 최소 세 차례에 걸쳐 광역지방자치단체를 통해 각 정당에 선거 현수막 안전 관리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해당 공문에는 △현수막에 3개 이상의 원형 바람구멍 설치 △강풍주의보 발생 시 현수막 즉시 철거 △과도하게 걸린 현수막 조치 등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명시됐다.
강풍이 불 때 현수막이 ‘돛’ 역할을 해 지지대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한 필수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 요청은 선거 현장에서 완전히 외면당했다.
결국 지난달 22일 강원 춘천시의 한 사거리에서는 지방선거 후보자 2명의 현수막이 걸린 신호등 기둥이 강풍을 맞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공문에 명시된 바람구멍 등의 안전 조치가 없어 현수막이 받는 풍압이 임계점을 넘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 같은 실태에 대해 한 정당 관계자는 "전국의 당 조직이 게시하는 현수막 현황을 일일이 파악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또 다른 정당은 "해당 공문을 받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행안부 관계자는 "아직 광역지자체에서 공문을 정당에 넘기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실제 안전 조치가 이행된 사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현수막 제작 업체 관계자들 역시 "디자인 훼손과 추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정당 측에서 바람구멍 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했다.
"선거법 예외라 해도 민사 책임은 별개"…법원, '공작물 책임' 엄격 적용
정치권은 현수막 설치 전 신고 의무가 없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앞세워 안전 규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법조계의 시각은 다르다. 선거 홍보용 현수막이라 하더라도 설치 시에는 옥외광고물법상 ‘광고물이 바람이나 충격 등으로 인하여 떨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안전 규정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위반해 사고가 발생하면 민법 제758조의 ‘공작물 책임’이 성립한다. 이에 따라 현수막의 소유자이자 점유자인 후보자와 정당이 일차적인 배상 의무를 지게 된다. 실제 법원은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않은 현수막 설치자에게 고도의 책임을 묻고 있다.
선거용 현수막에 바람구멍이 없어 강풍에 게시대가 쓰러진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선거용 현수막에 바람구멍이 없었던 사실이 인정되는바, 위와 같은 게시상의 부주의가 이 사건 사고의 발생에 일정 부분 기여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하며 설치자의 과실을 명확히 인정했다.
홍보 효과나 비용 문제를 이유로 정부가 권고한 바람구멍을 뚫지 않았다는 변명은 법리적으로 과실을 경감하는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부실 관리·방치 시 과실 비율 최대 80%…외주 위탁도 면책 안 돼
법원은 현수막의 고정 상태를 부실하게 관리하거나 방치한 경우에도 높은 과실 비율을 적용하고 있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현수막 끈이 풀린 상태를 불완전하게 재고정하여 방치하다 사고가 일어난 사안에서 설치자의 주의의무 위반을 인정해 책임을 70%로 산정했다.
고가도로에 불법 설치된 현수막을 사흘 이상 방치해 발생한 사고와 관련해 수원지방법원은 관리자의 책임을 80%로 무겁게 판단하기도 했다.
특히 제작과 설치를 외부 업체에 위탁했더라도 정당과 후보자의 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
정당이나 후보자가 바람구멍 없이 제작하도록 지시하고 업체의 부실 설치가 경합했다면, 민법 제760조에 따라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연대책임을 지게 된다.
법리적으로 강풍이라는 자연력이 일부 책임 제한 사유로 고려될 수는 있으나, 정부의 구체적인 안전 지침(바람구멍 설치 등)을 무시한 과실이 명백하다면 설치자 측이 손해배상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판례의 일관된 태도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 회장은 “바람구멍 설치나 정량적 풍속 기준 같은 안전 규정을 엄격히 법제화해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정당과 후보자에게 엄격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과 별개로,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실효성 있는 안전 대책이 법제화되어야만 거리에 난립하는 선거 현수막 사고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