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게 하려는 목적이 뚜렷하면 처벌받는데, 왜 성적목적 뚜렷한 '이 행동'은 처벌 안 될까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다치게 하려는 목적이 뚜렷하면 처벌받는데, 왜 성적목적 뚜렷한 '이 행동'은 처벌 안 될까

2020. 09. 22 11:15 작성2020. 09. 22 14:37 수정
안세연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y.ahn@lawtalknews.co.kr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목적이 분명한 행동이고,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낀 것도 확실하지만

성범죄로 처벌할 수 없는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 아니라서

"성도착적인 특이한 불법행위를 처벌할 법안 마련도 필요해 보여"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에서 벌어진 '신발 정액 테러' 사건. 범인은 잡혔고 실제 처벌까지 이루어졌지만, 단순 '재물손괴'가 적용됐다. 판결문 어디에도 '성범죄' 관련 혐의는 없었다. 왜 그럴까. /셔터스톡⋅편집=조소혜 디자이너

"이 사건은 성범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에서 벌어진 '신발 정액 테러' 사건. 피해 학생이 수업을 듣기 위해 공용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둔 사이, 다른 학생이 그 신발에 몰래 정액을 묻힌 것이다. 피해자가 즉각 대응에 나서 DNA를 확보할 수 있었고, 범인은 잡혔다. 그리고 실제 처벌까지 이루어졌다.


성범죄 혐의가 적용돼야 할 것 같은 이 사건에는 단순 '재물손괴'가 적용됐다. 벌금 50만원의 처벌이 나온 판결문 어디에도 '성범죄' 관련 혐의는 없었다.


피해자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뿐 아니라 대학 인권센터, 성범죄 상담센터, 법률구조공단 등의 도움을 받을 만한 곳들을 찾아 문을 두드렸지만, 어디에서도 뾰족한 방법은 찾지 못했다.


기자와의 통화에서 피해자 A씨는 "어느 곳에서도 이 사건을 성범죄로 처리할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로톡뉴스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형사법에 능한 변호사들과 관련 판례를 분석해봤다. 안타깝게도 "적용할 방법이 없다"는 답이 우세했다. "현행 법령으로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성적 행위는 성범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법률사무소 서화담의 백혜랑 변호사는 전향적인 법률 해석을 제시했다. 백 변호사는 "정액을 묻힌 신발을 그 자리에 갖다 두어서 피해자가 무심결에 신발을 신게 했다면 '발에 정액이 묻을 수도 있겠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것"으로 봤다. 이렇게 되면 강제추행이 적용될 여지가 있다. 동시에 "이런 성도착적인 특이한 불법행위를 처벌할 입법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목적이 분명한 행동이지만⋯성범죄로 처벌할 수 없는 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 아니라서

이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해 5월. 피해자가 강의실에서 명상 수업을 듣고 있던 때였다. 가해자는 이때를 틈타 운동화를 남자 화장실로 가져갔고 피해자는 수업 이후 불쾌한 일을 겪었다.


경찰 수사 결과 남성의 정액이 맞았지만, 성범죄가 아닌 재물손괴죄가 적용됐다. "현행법상 적용 가능한 혐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기관에서 돌아온 답변도 다 똑같았다.


가해자가 '성적 목적'을 갖고 이런 행위를 벌였다는 점을 명백해 보인다. 초동 수사를 담당한 경찰, 재판에 넘긴 검찰,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법원 모두 이 점에 이의가 없다.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낀 것도 확실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경찰⋅검찰⋅법원은 대체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도 왜 성범죄 혐의를 적용할 수 없는 걸까?


법률 자문
'법률사무소 서화담'의 백혜랑 변호사, '법무법인(유) 에이스'의 옥민석 변호사, '법무법인 온세상'의 설현섭 변호사, '리라법률사무소'의 김현중 변호사. /로톡 DB
'법률사무소 서화담'의 백혜랑 변호사, '법무법인(유) 에이스'의 옥민석 변호사, '법무법인 온세상'의 설현섭 변호사, '리라법률사무소'의 김현중 변호사. /로톡 DB


변호사들은 "현행 성범죄 관련 법 조항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법인(유) 에이스의 옥민석 변호사는 "형법에서부터 성폭력처벌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범죄 관련 조항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번 사건처럼 '물건(신발)을 대상으로' 삼아 성적 행위를 했다면, 모든 조항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이다. 가해자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체액을 피해자에게 묻히게 하려는 목적하에 신발을 더럽혔지만, 이런 경우에도 체액을 뿌린 '1차 대상'이 사람이 아닌 이상 성범죄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


법무법인 온세상의 설현섭 변호사도 "강제추행은 원칙적으로 사람에 대한 폭행 또는 협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고, 추행 행위 자체를 폭행행위라고 보는 게 대법원 판례"라며 "사안 같은 경우 신발에 정액을 뿌린 것을 두고 사람에 대한 폭행 또는 협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그 신발'을 볼 수 있게 했다면 성범죄 적용 가능

리라법률사무소의 김현중 변호사는 강제추행죄부터 음란물유포죄까지 현행법상 거의 모든 성범죄 혐의를 검토했지만 "거의 적용이 어려워 보인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 변호사는 "상대방 신체에 대한 접촉이 없으므로 강제추행에도 해당이 안 된다"며 "그렇다고 남성이 카메라를 통해 촬영한 경우도 아니므로, 카메라등이용촬영죄도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던 건 음란물유포죄였다. 정액이 묻은 신발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면 적용할 여지가 그나마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가해자는 정액 묻은 신발을 원래의 자리였던 신발장 가장 아래 칸에 넣어두었다.


이에 김 변호사는 "불특정다수인이 해당 신발을 볼 수 있게끔 해놓은 경우도 아니므로 음란물유포도 적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신발에 정액 넣어 신체에 닿게 했다면, '강제추행' 미필적 고의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법률사무소 서화담 백혜랑 변호사 역시 "현행 형법 및 성범죄에 관한 여러 특별법하에서 딱 맞는 구성요건은 없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창의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백 변호사는 "신발이라는 게 당연히 신체에 착용하는 의류에 해당이 되는 것"이라며 "정액이 든 신발을 닦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갖다 두었고, 피해자가 무심결에 신발을 신었다면 발에 정액이 묻을 수도 있겠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에 신발을 가져다가 압정을 뿌려놓고 신발장에 다시 갖다 놓았고, 그걸 신고 발에 피가 나고 다쳤으면 그건 상해죄가 된다는 논리와 같이 전향적인 주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실제 검찰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정액을 뿌리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입고 있지 않은 옷에 같은 행위를 하면 재물손괴만 적용한다.


백 변호사의 주장은 사람이 벗어놓은 의류에 정액을 뿌려놓았고, 그걸 몰랐던 사람이 옷을 입어 정액이 묻었다면 입고 입는 곳에 뿌린 것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다.


과거 판례도⋯재판부 "성적 가해 행위지만 성범죄 적용 불가"

하지만, 백 변호사도 창의적인 접근이라고 언급할 만큼 적용될 가능성은 낮다. 과거 사례도 유사하다. 지난해 말 2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된 '커피 체액' 사건이 대표적인데, 이 당시 검찰과 법원 모두 성범죄를 적용하지 못했었다.


같은 대학원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여성에게 10개월간 자신의 체액이 들어간 커피를 주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재판부는 "(해당 행위가) 단순히 커피 등을 못 쓰게 한 행위를 넘어, 성적 가해 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했지만, 현행법상 그의 행동을 성범죄로 단죄하지 못했다.


이때도 현행법상 강제추행 등 성범죄 조항이 '사람에 대하여' 추행했을 때 성립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백혜랑 변호사는 "이런 성도착적인 특이한 불법행위를 처벌할 법안 마련도 필요해 보인다"는 의견을 보였다.

나만 모르는 일상 법률 상식, 매일 아침 배달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