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취재원에게 노골적으로 '미인계' 쓰라던 언론사 사장, 정체를 알고보니
[단독] 취재원에게 노골적으로 '미인계' 쓰라던 언론사 사장, 정체를 알고보니
"너희 회사 대표이사"라고 속이고 피해자들에게 접근
사기꾼이 사칭한 직업만 3개 이상⋯악용해서 피해자 상대로 원치 않는 성관계
과거에도 같은 수법으로 범행 저질렀던 A씨⋯법원에서 실형 선고
![[단독] 취재원에게 노골적으로 '미인계' 쓰라던 언론사 사장, 정체를 알고보니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1607695478768259.jpg?q=80&s=832x832)
자칭 '국내 자동차회사 사장'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해당 회사 직원이었던 피해자에게 미국에서 온 '큰 손' 투자자를 만나라고 종용했다. 그리곤 자신의 1인다역을 맡아 그 '큰 손' 투자자 행세를 했다. 성범죄는 그렇게 이뤄졌다. /셔터스톡⋅편집==조소혜 디자이너
지난 2016년 말, 서울에 만화책에서 볼 법한 스펙을 갖춘 사람이 등장했다. 능수능란한 화술과 재력, 사회적인 위치. A씨는 누가 봐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단 직함만 세 개였다. 굴지의 국내 자동차회사 사장, 미국에서 온 '큰 손' 투자자, 유명 종편채널 대표이사. 모두 이뤄내기 어려운 각 분야 최고위직을 동시에 거머쥔 사람이었다.
이상한 건 그와 직접 업무를 해본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얼굴을 직접 본 직원이 한 명도 없었고, 늘 서울 지역번호(02)로 시작하는 일반 전화로 지시를 했는데 의아하게도 그 번호로 전화를 걸면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약 1년 반 뒤, 그는 갑자기 사라졌다.
두 회사의 대표이자, 큰돈을 굴리는 투자자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가 몸담은 회사에 비상이 걸렸을 테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의 직함은 모두 가짜였기 때문이다. A씨는 1인 3역의 사기꾼이었다.
① "나 자동차회사 대표이사야"
지난 2016년 12월 말. 서울의 한 자동차 전시장 안내데스크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곳 직원인 B씨가 전화를 받으니 A씨는 대뜸 "본사 대표이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업무상 필요하다며 B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갔다.
그 뒤부터 A씨의 '업무지시'가 시작됐다. B씨에게 '회사의 중요한 투자자'를 만나보라는 지시가 그 시작이었다. 때마침 계약직에서 정직원으로의 전환을 기다리고 있던 B씨는 A씨를 회사 대표라고 믿고 지시에 따랐다.
② "나 미국에서 온 중요한 투자자야"
B씨와 투자자는 서울 강남의 한 지하철역 인근에서 만났다. 투자자는 자신을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오래 생활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곧 한국에 여성 속옷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 사방은 저녁 8시가 넘어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투자자는 더 어두운 곳을 찾아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B씨를 유인했다. 마침내 다다른 한 빌라 주차장. 갑자기 투자자는 B씨를 반항하지 못하게 한 뒤 강제추행을 했다.
이런 일을 당했지만 B씨는 투자자를 자기가 몸담은 회사의 중요 이해관계자라 생각해 신고하지 못했다. 계속 걸려오는 그의 연락을 피하는 정도로만 대응했다.
그때 A씨가 전화를 걸어와 투자자를 만나라고 종용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투자자를 만나지 않으면 투자자와 있었던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망신을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범죄를 당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렇게 다시 투자자를 만나게 된 B씨. 지난 2017년 4월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만난 투자자는 DVD방에 가자고 요구했다. 상식에 벗어나는 요구를 받은 B씨는 완강히 거부했다.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과 DVD방에 가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고, 직전 만남에서 그가 보인 행위를 고려할 때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B씨가 "안 된다"고 버티자 투자자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 혼자 있던 B씨에게 때마침 '회사 대표' A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지 마라"며 마치 지금 상황을 본 것처럼 압력을 가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말에 B씨는 곧 돌아온 투자자와 함께 DVD방에 들어갔고 강제추행 범죄를 당했다.
이후 B씨는 투자자를 더 만났지만 큰 상처만 받았다. B씨는 투자자를 만날 때마다 성범죄를 당했고, 그중에는 성폭행도 세 차례나 있었다. 자세한 범죄 내용은 재판부가 판결문에 "죄질이 나쁘다"는 평가를 남길 정도였지만, 기사에서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회사 업무'를 이유로 만나고선 범행을 일삼던 투자자. 사실 A씨와 투자자는 동일 인물이었다. 그동안 B씨는 A씨와 전화통화 등만 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이 점을 노리고 A씨는 1인 2역을 하며 B씨를 속인 것이었다.

③ "나 종편 방송사 대표이사인데⋯취재원 소개해줄게"
지난 2018년 2월. A씨는 국내 종편 방송사의 대표이사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방송사 시청자센터에 전화해 상담원에게 자신을 "회사 대표이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선 상담원에게 회사 소속 젊은 여성 기자 네 명의 이름을 댔다.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달라는 요구였다.
그렇게 연락처를 얻은 A씨는 기자들에게 "나 대표이사인데"라며 뜬금없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취재원을 소개해줄 테니 잘 접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모로 승부해야 한다" "야한 농담을 받아칠 수 있냐"는 등 상식적이지 않은 접대 방법도 알려줬다. 또한 취재원을 잘 꼬시면 인사고과나 연봉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의 범죄 행각은 거기까지였다. 전화를 받은 기자들은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다. "누군가 여기자들에게 전화해 성적수치심을 일으키는 대화를 했다"는 내용의 진정서가 경찰서에 접수됐고,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기관은 A씨를 잡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걸려온 전화를 역추적했다. 그 결과 A씨가 전화를 걸 때 공중전화 등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붙잡힌 A씨는 재판에 넘겨졌다. 혐의는 △강간 △강제추행 △정보통신망법(정통망법) 위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통신매체 이용 음란)이었다.
여기서 '정통망법' 위반은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허락 없이 알아낸 범행에 적용됐다.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가 적용된 건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지난 2018년 9월, 서울중앙지법 제30형사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는 피고인 A씨의 범행을 계획적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계획이 매우 치밀하고 범행 수법도 교묘해 그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피해자들 모두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A씨는 이 사건 범행과 같은 방법으로 여성을 추행해 실형을 살고도 출소하자마자 또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알고 보니 A씨는 과거에 같은 방법으로 여성을 성추행해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번 범행은 출소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시작된 일이었다.
재판에서 피고인은 B씨에 대한 강제추행과 강간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피해자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고 속여 성관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를 속인 건 인정하지만, 피해자와 성관계를 한 건 강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재판부는 강간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이 확보한 증거만으로 당시 B씨가 피고인 A씨에게 저항하기 불가능했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이유에서다.
즉, B씨가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취지다. B씨가 피고인과 만나며 취미 등 개인 신상을 이야기한 점과 "퇴직금을 받을 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일하면서 피고인을 만났다"는 등으로 진술한 점이 근거였다.
그 결과 재판부는 ❶B씨를 상대로 벌인 강제추행 1건(투자자 사칭한 첫 만남)과 정통망법 위반 행위에는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❷B씨에 대한 또 다른 강제추행(DVD방 사건)과 여기자들에 대한 범행에는 징역 1년 6개월이 나왔다.
아울러 피고인에게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강제추행과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를 3년간 공개·공지,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제한 등도 명령했다.
피고인과 검사 측의 항소로 지난해 4월 항소심이 열렸다.
결론적으로 항소심은 피고인에게 유리했다. 2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제9형사부(재판장 한규현 부장판사)가 피고인이 DVD방에서 B씨에게 했던 행동을 강제추행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피고인이 회사 대표를 사칭하면서 △피해자 B씨에게 "투자자와 성적인 접촉을 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고 △DVD방에 있던 B씨가 저항이 곤란한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1심에서 선고된 형량(❷)이 10개월로 감형됐다.
이 사건은 같은 해 8월,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결과는 항소심과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