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Law, Talk!]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읽은 타다 ‘갈등’의 종식
[영화Law, Talk!]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읽은 타다 ‘갈등’의 종식
![[영화Law, Talk!]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읽은 타다 ‘갈등’의 종식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2019-07-19T19.59.35.926_323.jpg?q=80&s=832x832)
영화 <장미의 이름> 포스터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갈등’은 왼쪽으로 도는 칡과 오른쪽으로 도는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때 칡과 등나무가 대등한 식물인 것과 달리, 현실의 갈등은 상당한 왜곡이 반영된다. 복잡한 역학에서 일어나는 충돌마저 대등한 식물 전선의 충돌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외형의 대칭이 관계의 맥락을 삭제하는 꼴이다. 예컨대 ‘노사 갈등’은 지배에 맞서는 노동자의 변혁의 몸짓을 노사 두 축의 기계적 대립으로 포장한다.
사회적으로 대등한 두 축이 전제일 경우에만 섬세히 사용되어야 할 ‘갈등’이지만 주어진 현실 앞에서 엄격한 윤리는 지켜지지 않는다. 언론이든, 정계든, 학계든 갈등이라는 표현은 오남용된다. 결국 갈등의 표면만이 주목받고, 맥락은 지워진다. 갈등의 ‘해소’는 해소가 아니라 강력한 힘에 조응하는 결말로 유예된다. 지역이나 세대, 이념의 갈등이 반복되는 까닭이다.
택시업계와 타다의 갈등도 ‘갈등’이라는 단어가 부른 오해 탓에 각 입장의 득실만이 주로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겉으로는 대등한 이해관계자의 대립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기존 소유경제에 저항하는 공유경제의 혁신에 가깝다. 우리는 지금, 소유의 확대가 아니라 소유의 파괴로 시장 문법이 전환하는 기로에 서있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타다 ‘갈등’의 예정된 종식을 읽을 수 있다.
장미는, 이름을 남길 뿐 사라진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장미의 이름>은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해결 과정을 그렸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표면적으로는 추리영화지만 중세가 막을 내리던 때의 풍경과 혼란이 넘치게 살아있다. 신을 버리고 과학과 이성을 택한 인간의 방황이 영화의 정서를 지배한다. 사상가 루카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별도, 지도도 없는 시대의 길 찾기’가 막 시작된 것이다. 1989년에 개봉했지만 오늘날에도 색이 바래지 않았다.
영화의 쟁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둘러싼 윌리엄 수사(숀 코레니 분)와 호르헤 수사(표도르 샬리아핀 주니어)가 지닌 세계관의 충돌이다. <시학 2권>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책인데, 비극을 주제로 한 1권과 달리 희극을 주제로 한다. 호르헤는 <시학 2권>을 금지하기 위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웃음이 인간의 원죄와 신을 잊어버리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호르헤는 웃음을 통제하려고 했다. 호르헤는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이때 동시에 중세가 멸한 것으로 영화는 묘사한다.
호르헤 수사 / 영화 <장미의 이름> 스틸컷
호르헤와 윌리엄은 각자 중세와 근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데, 이들의 충돌은 ‘갈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가 진실과 허위, 선과 악 등의 갈등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관성처럼 여겨지는 ‘절대적 진리’에 회의를 제기하고, 그늘에 가려진 또 다른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다. 제목과 달리 영화에서는 장미가 한 송이도 나오지 않는다. 진리는 실체로 구현할 수 없고, 사라지며 이름을 남길 뿐이라는 게 유일한 해석이다.

윌리엄 수사와 그의 제자 / 영화 <장미의 이름> 스틸컷
불탄 ‘시학 2권’과 ‘웃음’, 흐지부지 된 ‘개편안’과 ‘공유경제’
큰 변화나 혁신을 일컬어 ‘코페르니쿠스적 성취’라는 말을 한다. 타다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읽는다. 타다와 택시업계의 ‘갈등’은 시대의 흐름에 드리운 적대의 전선이자 오독이다. 둘의 충돌은 기득권의 이해관계 갈등이 아니다. 공유경제와 기존 소유경제의 거대한 충돌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며, 소유경제라는 절대적 진리에 회의를 제기하는 탐구이자 확정된 미래이다.
모든 진보가 정의라는 뜻은 아니다. 택시업계의 반발도 당연하다. 이들이 잃을 경제권에 대해서도 적절한 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진리를 막아서도 안 된다. 인문, 사회과학에서 정의의 규범학을 복권했다는 평가를 받는 존 롤스 교수의 주장은 사회 구성원들은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gnorance) 상태에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무지의 베일이란 부, 지위, 재능, 등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의 가르침은 합리적 이기심이 모든 사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의로운 선택을 가능케 한다는 데 있다.
타다로 대표되는 승차공유는 처음부터 택시업계와의 이해충돌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언론은 연이어 택시와 타다의 ‘갈등’을 강조했고, 이번 개편안은 택시 위주의 상생안으로 짜였다. 김상도 국토부 장관은 “카풀은 법이 통과되는 범위 내에서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시학 2권>을 불태운 호르헤 수사가 겹쳐보였다. 구한말의 흥선대원군도 옆에 있었다.

타다와 택시 / 사진 연합뉴스
공유경제는 디지털 전환시대에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2025년이면 공유경제의 전 세계 시장규모가 3350억 달러에 이를 예정이고, 에어비앤비는 이미 세계 1위 호텔기업 힐튼의 기업가치를 뛰어넘었다. 김동연 부총리가 토로한 대로 “고통스럽지만 안 갈 수 없는 길”이고, 국민 대다수도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다.
1327년, 영화에서 호르헤는 웃음을 통제하기 위해 <시학 2권>을 불태웠지만 ‘웃음’은 소멸하지 않았다. 지난 17일의 개편안은 승차공유를 포함하지 않았고, 타다의 수익성은 당분간 악화하겠지만 그래도 공유경제는 온다. 타다를 둘러싼 ‘갈등’의 오독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강물처럼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