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사법' 전도사 임수희 판사 "이.생.망⋯이번 생은 회복적 사법 때문에 망했죠"
'회복적 사법' 전도사 임수희 판사 "이.생.망⋯이번 생은 회복적 사법 때문에 망했죠"
2013년부터 '회복적 사법' 실현 중인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임수희 부장판사
진심 어린 소통과 화해 강조하는 판사도 분노한 '텔레그램방 사건'
그래도 회복적 사법을 놓을 수 없는 이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회복적 사법을 가지고 매일매일 야전에서 전투를 치른다"는 임수희 판사. 실제로 회복적 사법의 현장은 어떨지 궁금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가슴 찡한 화해와 사과가 오가는 공간일까. /천안=박선우 기자
'n번방'(성착취물 텔레그램 공유방)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지난 17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으로 향했다. '회복적 사법'을 주제로 한 임수희 부장판사와의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극악한 범죄와 관련된 어두운 기사만 쓰던 와중에 화해, 치유 같은 감성적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실제로 회복적 사법의 현장은 어떨지 궁금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가슴 찡한 화해와 사과가 오가는 공간일까. 사무실을 벗어나 10년 가까이 회복적 사법을 실천하고 있는 임 판사에게 가는 동안 기대감은 더 커졌다.
임수희 판사는 지난 2013년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서 회복적 사법 시범 실시사업에 참여한 이후 현장에서 회복적 사법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회복적 사법에 대해 느낀 점과 경험을 책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판사와 함께 하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로 풀어내기도 했다.
임 판사의 집무실에서 내리 반나절 동안 진행된 인터뷰. 임 판사의 회복적 사법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엄격한 처벌 뒤엔 무엇이 있는지, 당사자 입장에서 집요하게 좇고 보듬으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친 뒤 서울로 돌아와 n번방 사건을 취재하는 동료들을 보니 문득 '박사' 조주빈과 같은 이들에게도 회복적 사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임 판사에게 뒤늦게 n번방 사건에 대해 물었다.
임 판사는 의견을 밝히기에 앞서, 사건을 이렇게 이름 지었다. "여성·아동 등을 주요 대상으로 한 영리목적 성폭력·성착취·성학대·인격살인 텔레그램방 사건." 그러면서 "이 부분 명명에서 한 글자도 생략하거나 요약하지 말아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소통과 화해를 강조하는 임 판사도 n번방 사건에 분노했다.
임 판사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회복적 사법의 적용 이전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원래의 기본적인 형사 사법처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영역에서 범죄가 점차 극악하게 진화해 오면서, 거의 살인과 같다고 할 만큼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며 "구체적 사건에 관해 기본적인 형사 사법처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아직' 회복적 사법의 적용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책임의 문제다. 응보사법은 잘못한 만큼 형사 책임을 지게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피해가 회복되지 않는다. 회복적 사법은 응보사법이 다할 수 없는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한다. 즉, 피해를 복구하고 공동체가 회복되게 하도록 하는 책임을 가해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다. 가해자가 책임을 정확히 져야 피해도 회복된다.
그래서 응보사법조차도 확립되지 못한 사회에서 회복적 사법은 어불성설이다. 난 응보사법을 굉장히 좋게 본다. 그게 없으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
내가 생각했던 회복적 사법은 애틋하고 말랑말랑한 감성적 느낌이었다. 가해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들여다보고 책임을 지도록 돕는다는 것은 조금 더 단단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임 판사는 이 과정이 대화를 통해 이뤄진다고 했다.

"피해자에게서 가해로 인해 파괴된 핵심을 들어보기 전에는 피해의 실상을 선명하게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고 했을 때 '얼굴이 좀 부었네?'로 끝나지 않는다. 마음을 얼마나 다쳤고, 부부 관계는 얼마나 파괴가 됐는지 등의 피해 실체는 피해자의 외침 즉 말을 잘 들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해자는 보통 자신이 어떤 행위를 했고, 잘못인지 아닌지도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이런 가해자가 피해자의 말을 듣는 과정을 거쳐야 '자신이 한 가해의 실체'를 알 수 있고 그래야 저절로 반성과 사과의 말도 나오게 된다.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고 가해자는 피해자의 말을 잘 듣는 것. 회복적 사법의 핵심 출발 지점이다."
"지금은 피해자가 경찰과 검찰에 말을 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 가해자한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해자도 '죄송합니다'는 말을 판사한테 반성문으로 써내지, 피해자에게 하는 건 아니다. 이건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관계가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저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거 정말 보고 싶어요.'
피해자들은 이 말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첫 번째 요구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사과다. 그분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피해자다. 그 피해자가 지금 원하는 것.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옳으냐 그르냐. 한일관계에서 필요하냐 아니냐. 그 접근이 전략적으로 맞냐 틀리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존하고 실재하는 피해자가 현재 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가해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싶다는 것. 그것을 봐주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필요성을 갖고 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을 강하게 처벌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린다. 하지만 피해자가 원하는 게 강하게 처벌된다고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크게 나눠보면 ①준비 단계 ②본 단계 ③사후 단계다. 준비 단계는 피해자는 피해자별로 준비시키고 가해자는 가해자별로 준비시킨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난 절대로 회복적 사법 절차를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다 필요 없어요"라고 했을 때 그 부분에 공감해서 충분히 들어주면, 마음이 풀리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온다.
가해자도 참여할 준비가 돼야 한다. 가해자가 억울한 게 많으면, 얘기하러 나온 피해자가 괜히 2~3차 피해 입을 수 있다. 피해자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준비가 필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짜고짜 만나면 만날 때마다 더 싸우게 될 수 있다.
본 단계(대화하고 소통하는 단계)는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이나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된다. 사후 단계에서는 본 단계에서 나온 결과물과 관련해 앞으로 이행해야 될 것이 있다거나 그런 것들이 제대로 이행이 됐는지, 새롭게 문제점이 나타난 게 있는지 등을 확인한다."

"소통이 반드시 대면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비대면도 가능하며, 그 방법은 전문가의 분석을 거쳐 적절하게 정해진다."
소통의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다. 여러 방식이 고려될 수 있다. 임수희 판사의 사무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 그 실마리가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크레파스와 색연필'. 판사의 업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피해자 중에 언어적으로 자기가 입은 피해를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건 나이가 어린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물건이다. 이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심리 상태를 파악한다. 사건을 알기 위한 매개체인 것이다."
임 판사는 가정 폭력이나 학교 폭력 등을 겪은 어린 당사자들과 그림으로 소통한다고 말했다. 전문적으로 심리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그림 속 표현으로 남긴 자신들의 마음. 임 판사는 각양각색의 색깔과 선을 더듬어가며 피해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가해자의 반성을 끌어낸다.

"'안 한다. 못 한다. 왜 해야 하냐. 그 생각하기도 싫다.' 이런 경우가 힘들고 어렵다. 당사자들이 회복적 사법적인 패러다임이나 가치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회복적 사법에 대한) 설명도 소개도 진행도 그렇고, 말하자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책까지 쓰게 됐다.
결국 사과나 용서도 이뤄졌지만, 직접적으로 못 했던 아쉬운 사건이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린아이들이었는데, 부모들이 나한테 아이들을 보여주는 것도 힘들어했다. 아이들끼리 만나는 자리가 성공만 했다면 치유 효과가 더 컸을 것 같은데 굉장히 어려웠다."
회복적 사법의 또 다른 어려움은 아직 프로그램이 제도화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원이 만들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시민의 입장에선 생소할 수밖에 없다. 현재 법원에서 '회복적 사법적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소년보호사건에 도입된 화해권고제도 외에 없다.
임 판사는 이렇게 제도화가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회복적 사법에 대한 믿음으로 사건에 접근하고 있었다. "회복적 사법을 가지고 매일매일 야전에서 전투를 치른다"고 자신을 칭한 이유도 이런 점 때문이었다.
"제도화할 때 연구가 많이 되어야 할 부분이다. 회복적 사법 절차를 통해 가해자에게 수사상, 기소상, 재판상, 양형상 어떤 방식으로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인가, 혹은 줘도 되는가. 그로 인해 정상적 형사사법절차를 악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 있다.
그런데 현행 형사사법 절차에서도 양형 기준상 실질적인 피해 회복이나 피해자의 처벌불원의사는 일정한 경우 피고인에 대해 감형 요소로 참작해 주고 있다.
하지만 형사재판 절차 중에 있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회복적 사법 절차를 거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법원 바깥의 영역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사후 단계는 지역사회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
"첫사랑은 안 이뤄지지 않나. 괴롭고 벗어나기 힘들고. 포기하려고 하는데 한번 나를 향해 돌아보고 웃어주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웃음) 원래 친한 친구랑 놀고 싶지, 싸운 친구들 굳이 만나서 화해시키는 것 너무 힘들다.
그런데 회복적 사법을 통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순간들이 있다. '어? 사람이 바뀌네. 너무 신기하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는 관념이 흔들린다. 절대로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교착된 관계가 풀리고 사람이 바뀌는 것을 한번 보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좋은 결과가 주는 기쁨이 약간 중독적이라 벗어나기 쉽지 않고 애증의 관계다. 그래서 이.생.망. 이다. 회복적 사법을 만난 이생은 망했다. (웃음)
그리고 이젠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떤 조건과 상황, 작용 하에서 인간이 어떻게까지 바뀌는가. 그리고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고, 관계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다."
"판사기 때문에 형사재판에도 회복적 사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화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숙제나 고민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올해 사법정책연구원의 연구과제 중 회복적 사법에 관한 법원의 역할이 포함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굉장히 기쁘고, 기대된다. 거기서 좋은 연구가 나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