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타준 미숫가루, 흰 죽, 그리고 마지막 찬물…남편은 숨졌지만 '살인범'은 없었다
아내가 타준 미숫가루, 흰 죽, 그리고 마지막 찬물…남편은 숨졌지만 '살인범'은 없었다
대법원, '합리적 의심의 여지' 있다며 파기환송
"직접 증거 없는 심증만으론 유죄 안 돼"

직장 동료의 커피에 살충제를, 남편의 음료에 니코틴을 넣은 두 사건 모두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핵심은 ‘살인의 고의’와 ‘직접 증거’의 부재였다. /셔터스톡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내 커피에 독을 탔다면?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직장 동료의 커피에 살충제를 탄 간호조무사, 그리고 남편이 마실 미숫가루와 물에 치사량의 니코틴을 넣은 혐의를 받은 아내. 두 사건 모두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법원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유독 물질을 사용했음에도 왜 이런 판결이 나왔는지, 28일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을 통해 법적 쟁점을 면밀히 추적했다.
"죽일 의도 없었다"… 커피에 살충제 넣은 동료, 살인미수 '무죄'
사건은 지난 3월 경기도 구리의 한 병원에서 발생했다. 50대 간호조무사 A씨는 동료 B씨의 커피에 몰래 살충제를 넣은 혐의(살인미수·특수상해)로 기소됐다. 평소 B씨가 자신에게 핀잔을 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범행이었다. 다행히 B씨는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 바로 뱉어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검찰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농사용 살충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로엘 법무법인 남채은 변호사는 방송에서 그 이유를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살해하려는 의도, 즉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원이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은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범행에 쓰인 살충제는 살해를 위해 특별히 구매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 원래 있던 벌레 퇴치용이었다.
- 커피에 넣은 살충제의 양이 실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치사량인지 불분명했다.
- 범행 전 살충제의 위험성을 검색하는 등 치밀하게 계획한 정황이 없었다.
다만 재판부는 유독 물질로 동료에게 상해를 입히려 한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 특수상해 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까지 간 '니코틴 살인 사건'… 반전의 무죄, 왜?
더 큰 사회적 파장을 낳았던 '니코틴 남편 살인 사건'은 법원의 엄격한 증거 판단 원칙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11년 차 부부였던 이들의 비극은 2021년 5월 시작됐다. 남편은 아내가 타준 미숫가루를 마시고 출근한 뒤 극심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퇴근 후 아내가 끓여준 흰 죽을 먹고 상태가 악화됐고, 다음 날 아내가 건넨 찬물을 마시고 잠든 뒤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니코틴 중독'이었다. 수사기관은 아내가 남편 사망 며칠 전 니코틴 원액을 구매한 사실과 3년간 내연 관계를 이어온 남성이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내를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아내의 유죄를 인정하며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판결은 완전히 뒤집혔다.
남채은 변호사는 "대법원은 공소 사실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고 전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외도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남편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을 주장했고, 6살 자녀 외에는 직접적인 목격자도 없었다. 결국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범죄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심증만으론 유죄 안 돼"… 법원의 엄격한 잣대
두 사건은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명확히 보여준다. 아무리 강력한 정황 증거와 심증이 있더라도, 피고인의 유죄를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채은 변호사는 "과거 '만삭 의사 아내 사망 사건' 역시 대법원에서 한 차례 파기환송된 바 있다"며, "당시 대법원은 의문점이 있는 부검의 소견에만 의존해 유죄를 인정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비록 해당 사건은 파기환송심에서 사망 원인을 더 철저히 입증해 유죄가 확정됐지만, 그 과정은 간접 증거만으로 유죄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치밀하고 엄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