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3)] 사법연수생에 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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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23)] 사법연수생에 임함

2020. 10. 15 14:38 작성2020. 10. 15 20:01 수정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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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정형근 교수. 나경원 전 의원(사진 맨 왼쪽), 원희룡 제주도지사 (왼쪽 부터 세 번째), 금태섭 전 의원(오른쪽)도 함께했다. /정형근 교수 제공, 나경원⋅원희룡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1993년 3월, 서울 서초동에 있는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은 대법원 소속이었다. 그래서 대법원장 명의의 "사법연수생에 임함"이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임명함'이라고 하지 않고 '임함'이라고 한 것을 보고, 법조인들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생각되었다. 입소 후에 받은 것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연수원 배지였다. 삼각형 모양의 1㎝ 될까 말까 한 아주 조그만 형태의 배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때는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제 저걸 한번 달아 볼까!"


저 배지를 달고 출근하면서 교대역에서 연수원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도로변을 걸을 때면, 고시 공부하겠다고 천관산 탑산사를 헉헉거리며 오르던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나는 37세에 연수원에 입소했기에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동기들이 열명 가량 되었다. 40세로 최고령 합격하신 형이 동기회장을 맡았고, 최연소는 20세로 대학 재학 중 소년 등과한 청년이었다. 1982학년도 대입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한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사법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했다. 언론에서는 여성 합격자로 나경원 전 의원 등 모두 16명이 연수원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모두 합격한 후 뒤늦게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송언종 전 체신부장관도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송 장관님과 구내식당에서 1000원짜리 점심을 함께하곤 했는데, 장관까지 하신 분이 구내식당 등에서 소탈하게 젊은 연수생들과 어울리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정형근 교수의 사법연수생 임명장과 연수원 배지. /정형근 교수 제공


그 당시 「사법연수원운영규칙」에는 "수습기간이 1년 이내인 연수생은 5급, 수습기간이 1년을 초과한 연수생은 4급 상당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연수원 1년차는 5급 공무원이고, 2년차는 4급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연수원 수료 후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면 3급 공무원이 된다고 했다. 법률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연수과정에 있는 자들에 대한 직급이 상당히 높다고 느껴졌다. 공무원 신분이라 월급도 나왔는데, 40만원 가량 되었다. 이걸로 생활이 안 되니 마이너스 대출 통장을 개설하거나 집의 도움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긴 수험생활에서 해방된 홀가분함에 젖어서인지, 마치 대학 신입생들처럼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서초동 법조단지의 봄을 만끽하는 분위기였다. 저녁 모임을 하면 첫 잔부터 폭탄주가 돌았고, 노래방까지 이어질 때도 많았다. 나도 한 곡 할 수 있도록 가창력이 없어도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골라 준비하였다. 그 노래 하나로 연수원 수료할 때까지 각종 모임을 소화했다.


연수 과정은 50명으로 편성된 6개 학급으로 운영되었다. 학급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반장을 맡았고, 그다음으로 고령자 3명은 조장을 했다. 대학 재학 중에 일찍 합격한 동기는 총무가 되었다.


그래서 나 역시도 조장을 맡았다. 초등학교 때도 못 해 본 분단장을 연수원에서 해본 셈이다. 조원 중에는 지금도 법원과 검찰에 재직 중인 사람도 있고, 퇴직 후 변호사 개업하거나 로스쿨 교수나 국회의원(금태섭 전 의원)으로 활약한 동료도 있다.


연수원 교수는 부장판사·검사였고, 비전임으로 출강하는 변호사들도 있었다. 연수생은 대법원 소속 공무원이라 공무원 출퇴근 시간을 지켰다. 그래서 항상 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으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출근할 때는 곧바로 교실로 향하지 않고 지도교수님 방에 모여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법원이나 검찰에서의 경험담을 들으며, 법조인의 자세에 대하여도 배우게 되었다. 대화 중에 어느 동료는 "교수님은 이제까지 지내오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질문을 했다. 그 즉시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였지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말은 나중에 다른 법조인들에게서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몸이 불편하셨는데, 중학교 입학 당시 기독교 사립중학교에서 장애인이라고 입학을 불허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그 일로 기독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법연수원 수습과목은 아래와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사법연수원운영규칙 제18조).

1. 법률과목 (일반법연구, 특별법연구, 외국법연구)

2. 실무연습 (민사재판실무, 형사재판실무, 검찰실무, 변호사실무, 관련분야실무)

3. 교양과목 (일반교양과목, 법학인접과목, 법조윤리)

4. 견학 및 논문

5. 기타 사회발전에 대처하는 새로운 분야에 관한 과목


연수 과정은 종일 수업을 듣거나, 아침 9시부터 민사·형사 판결문을 작성하거나, 검사의 공소장을 써서 제출한 후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내용이 간단한 사건에 대한 판결문이나 공소장 작성부터 시작하여, 복잡하고 어려운 난해한 내용의 기록을 검토하고 필요한 서면을 작성하는 작업을 익혀 나갔다. 간혹 변호사 실무를 위한 소장 작성 등에 관한 시간도 있었지만, 연수원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판·검사 양성에 맞춰져 있었다. 변호사 실무교육은 구색 맞추는 정도로 느껴졌다. 연수생 절반 정도가 판사·검사로 임용되고, 교수들 역시 현직 부장판사와 검사들이다 보니 교육체계가 그렇게 짜여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매우 이례적인 점은 6개 학급에서 강의하는 교수들이 전부 다른데, 강의내용은 완전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전에 강의 내용을 협의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의 교수사회에서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겨진다. 연수원 교수들이 판·검사와 같은 공무원들이라서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그런 수업 방식 때문에 모두에게 동일한 내용의 교육이 가능했던 것 같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능력 좋은 동기들이 많다는 감탄을 하곤 했다. 특히 사건기록을 작성하는 날에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종일 씨름을 하고서도 시간이 부족하면, 그다음 날 작성하여 제출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경찰대 출신 동기는 기록을 작성하는 날이면, 오전 10~11시경에야 뒤늦게 출근하곤 했다. 간밤에 한잔했는지 진한 술 냄새가 풍겨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툼한 사건기록을 재빠르게 앞뒤로 넘기며, 오후 4시 무렵이면 학급에서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한 후 유유히 교실을 나갔다. 일찍 제출하였던 답안의 내용도 탁월한 평가를 받아 주변을 놀라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연수원에 간 나도 열심히 하려는 마음 자세는 가졌지만, 고시공부 할 때 같은 절박감은 없었다. 한참 기록을 작성하고 있을 때 반장과 다른 조장 두 분이 이른 점심을 하자고 했다. "설마 너도 판·검사하겠다고 기록 열심히 쓰는 건 아니지?" 하면서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12시 점심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우리는 막걸리 집으로 가서 끝도 없는 대화를 즐겁게 나누다가 오후 늦은 시간에 교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판결문·공소장 작성하는 것 말고도, 연수생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법조인다운 전문성은 물론 각 분야의 풍부한 상식도 가져야 한다면서 개설된 음악 감상과 미술 수업도 들었다. 외교부 공무원이 의전 관련 강의도 하고, 법의학 시간에는 다양한 사인의 변사체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중앙청에 있는 국립 박물관을 견학하고, 대학로에서 연극 보기, 여의도 증권거래소를 방문하고 증권회사에서 업무를 설명 듣기도 했다.


연수생 전체가 공통적으로 이수하는 과목은 대강당에서 진행되었다. 강당 수업은 2시간가량의 일회성 강좌로 진행되었다. 사회 저명인사의 초청 강연과 법정에서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상영도 했다. 미국 예일(Yale) 대학 로스쿨 학장도 강의를 하였는데, 통역을 하던 변호사가 하도 벅벅대니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변호사의 통역 장면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예일대 졸업생이라던데 너무 심하게 전달을 못 하니, 오후의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오는 깊은 졸음에 잠겨 있는 모습들이 민망하게 많이 보였다.


나중에 헌법재판관이 되신 어느 부장판사님은 판·검사들이 하도 자주 대접을 받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많다고 했다. 어떤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와 판사인 아들과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 후에 그 판사는 평소처럼 먼저 식당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그 아버지가 식대를 계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설마 그랬을까 싶지만, 진짜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법조인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일본어 시간이 이른 아침에 개설되었고, 원하는 이들은 자율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 조금 익힌 일본어 덕분에 나중에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자료 읽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은 철도청의 배려로 연수생 전체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서 한적한 철도 건널목 부근에서 내렸다. 기차가 달려올 때 갑자기 건널목으로 승용차가 진입했을 때 기차가 급제동으로 사고 발생을 방지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건널목에 차량 모양의 판자로 만든 구조물을 설치해 놓고, 기차가 그것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아도 사고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런 실험은 장차 판사나 검사, 변호사로 진출할 예비법조인들에게 철도 사고에서, 그 과실이 철도청의 과실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려는 시도로 보였다.


연수원 건너편에는 삼풍백화점이 있어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을 때는, 그곳 지하 식당가를 자주 찾았다. 대학 선배가 격려 방문을 하였을 때도 삼풍백화점 분위기 있는 중식집에서 모였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1995년 6월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그 백화점을 매일 드나들면서 연수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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