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Law, Talk!] 절반의 주관… 영화 <그녀에게>의 '강간'의 왜곡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영화Law, Talk!] 절반의 주관… 영화 <그녀에게>의 '강간'의 왜곡

2019. 07. 05 18:19 작성
안세연 인턴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y.ahn@lawtalknews.co.kr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영화 <그녀에게>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법, 기록, 역사 등은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객관적'이라고 '주관적'으로 믿고 있는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에드워드 카는 시종일관 역사 서술에 있어서 객관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의 서술에는 틈새가 있고,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시대의 담론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주관은 만들어진다.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가치가 '생성'되면 그때 여집합이 '결정'된다. 예컨대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진리는 메커니즘에 의해 유통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근래에 정신적 질병이라고 여겨지는 광기가 르네상스 시대에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광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비롭고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춘 인물로 여겨졌다.


만들어진 주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광기가 질병으로 분류되어 사회에서 쫓겨난 건 17, 18세기 들어 노동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광기는 비생산적인 질병이 되었고, 치료의 대척점으로 쫓겨나, 광인의 감금과 강제입원을 가능케 하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결국 법은 주관적인 해석에 의지한다. 해석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변화하며 작동한다.


영화 <그녀에게>의 질문은, 누구의 질문인가


페도르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도 같은 지점에서 주관의 가변성을 질문한다. 영화의 주된 질문은 베니뇨(하비에 카마라 분)의 사랑이다. 베니뇨는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레오노르 와트링 분)를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말'에 가치를 두지 않고,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베니뇨의 사랑은 일방적인 돌봄과 '말 던지기'로 이루어진다. '말 건네기'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말을 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원제 <talk to her>은 모순이다. <speak to her>가 적절하지 싶다.



영화의 장치와 기법은 무척 정교하다. 전반부에는 무용극 '카페 뮐러(Cafe Muller)'가 나오고 후반부에는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를 배치했다. 극중에는 무성영화가 두드러진다. 무용극과 무성영화는 둘다 말이 없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예술의 미학이 말을 배제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감독의 의도가 노골적이다. 소통과 말이 사랑의 본질이 아닐 수 있다는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영화의 도발적인 질문은 강간까지 관통한다. 베니뇨는 의식이 없는 알리샤를 강간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강간이라 부를 수 없다고 호소한다. 영화는 '강간'이라는 말은 언어라는 도식에서 벗어날 수 없고, 형성된 개념의 틀 역시 본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 속에 있다고 시사한다. 영화는 베니뇨의 사랑이 식물인간 알리샤를 깨웠다는 식으로 연출한다. 강간 가해자일 뿐인 베니뇨를 연민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질문에 대다수는 고개를 끄덕인 듯하다. <그녀에게>는 BBC가 선정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에서 28위에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영화의 질문이 틀리지는 않았다. 전술했듯 객관은 없으며 주관은 가변한다. '강간'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으며 베니뇨의 사랑이 사회에서 사랑이라고 언젠가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이 없다는 건 주관만이 실존한다는 것과 동격인데, 이때의 주관이 '누구의 주관'인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질문의 주체는 당연하게도 권력자가 되며, 여성이 아닌 남성이 된다. 객관은 없지만 권력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질문은 젠더의 편향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편향된 해석은 거의, 언제나 왜곡을 끌어낸다. 지난 1월, 미국에선 식물인간 환자를 성폭행해 출산하게 한 범인이 잡혔다. 범인은 환자가 입원해있던 요양병원의 간호조무사였다. 그는 첫 재판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영화의 베니뇨와 설정이 같다.


현실의 강간죄를 둘러싼 편향과 왜곡


영화가 강간을 다루는 방식은 현실의 사법 기관과 다르지 않다. 1990년대 이전까지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정조'였다. 순결해야 할 여성의 몸을 지키기 위해 강간죄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강간죄의 객체 역시 '사람'이 아니라 '부녀'였다. 1970년의 대구고등법원 판사들은 성폭행 피해자를 가해자와 법정에서 약혼까지 치르게 했다. 판사들은 “기왕 버린 몸이니 짝을 지어 백년해로시키는 게 좋겠다”라며 양가 부모를 설득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정조'의 대안이 된 지금의 현실에서도 젠더의 편향은 그대로 답습된다. 남성 중심적 권력은 피해를 본 여성의 '피해자다움'이라는 왜곡된 주관을 만들어냈다. 성범죄 사건을 여성은 '폭력'으로 이해하고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반면 남성은 '섹스'로 이해하고 피해자를 의심한다. 2013년에는 회사 직원을 성폭행한 남성이 1심 재판부에서 무죄를 받았다. 판단 근거 중 하나는 피해자가 스키니진을 입어서 강제로 벗기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지난달엔 10대 초등생을 성폭행한 학원장이 2심에서 강간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상대방의 거부 의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강간이 협박이나 위협, 등으로 판결됨에 따라 '비동의 간음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피해자에게 '저항했나'고 묻는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동의받았나'고 묻자는 게 골자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논의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강간죄 구성 요건을 바꾸는 입법안은 9개나 발의되어 있으나 공론화와 성과는 부진하다.


세상에 만연한 절반의 주관


영화가 그토록 집착하는 질문은 남성만의 질문이다. 강간은 남성의 언어에서만 구애의 수단이며 숭고한 사랑의 실현이다. 여성에게 동의받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일 뿐이다. 스토킹도 마찬가지고, 데이트 폭력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가 세상의 절반만 볼 수 있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세상의 전체를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남성이 세상의 절반만 볼 수 있다면 여성은 세상의 전체를 볼 수 있다. 지금 사회를 지배하는 주관은 남성의 해석 체계에 의지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질문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권력이다. 여성에게 질문과 언어의 상실은 인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사회의 지배주관에 의해 휘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객관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권력자의 주관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명징하게 인식할 때 해방은 시작한다. 우리는 모든 언어와 질문을 의심해야 한다. 흔히 그런 것을 인문학이라 하고, 사회운동이라고 하며, 칸트의 준칙대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나만 모르는 일상 법률 상식, 매일 아침 배달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