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6)] 내 인생의 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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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6)] 내 인생의 봄을 향하여

2020. 05. 20 12:29 작성2020. 06. 10 10:38 수정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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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에 경희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장하다!" 한마디를 하시고 곧바로 끊었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비장하게 들려왔다. /경희대학교 페이스북

1984년, 28세에 경희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천호동에 있는 극장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전화로 합격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장하다!" 한마디를 하시고 곧바로 끊었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비장하게 들려왔다. 등록금이 70여만원이었는데, 내가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납부했다. 내가 주머니에서 10원짜리 동전까지 꺼내서 등록금을 내자 경리과 직원이 웃는 표정을 보였다. 어머니에게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 다닐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검찰청 사직 후 받았던 약간의 퇴직금은 재수하느라 다 써버린 상태였다. 수중에 가진 돈이 전혀 없는 상태라 버스 타고 등교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신입생 신체검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어떤 분이 다가와서 "형제님! 예비역이시죠?"라고 물었다. 예비역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예비군으로 알아들었다. 무슨 설문지를 주더니, 성경 공부를 할 것을 권했다. 대학에 가면 성경에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는 법대 선배였다. 입학하기 전에 할 일이 없어 날마다 방바닥에 엎드려 성경을 읽었다. 신이 존재하는지 궁금했고, 대학생이 되었으니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성경을 읽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하는 인생의 의미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떤 인물이 몇백 년씩 살았다는 성경 기록은 황당하게 여겨졌다.


입학식 날 어머니와 형님이 축하하려고 학교에 오셨다. 집 밖에서 바라본 형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검붉은 얼굴이 온갖 풍상에 찌들어 있었다. 형은 어려운 생활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갖고 있었다. 형은 내가 검찰청 다닐 때 중매로 약혼을 했다. 약혼식도 기쁘게 치렀다. 그 일은 큰 경사요, 어려움 중의 희망이었다. 형수가 될 분은 명절 때에는 선물을 사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약혼을 한 지 2년이 넘어도 돈이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중매쟁이가 약혼 패물을 가지고 와서 파혼을 통보했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어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깨져 버린 거울 조각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 형의 약혼녀는 마지막 인사차 집에 들렀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처럼 한복 차림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한탄조로 말했다. "그래 잘 살아라. 정형률이 이웃집에서 잘 살아라." 형은 아무런 말이 없이 방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분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그로부터 형은 서른다섯이 넘어서도록 혼자 지냈다. 어려서부터 소처럼 일만 해온 삶이었다.


우리 가족은 대학 본관 앞에서 역사적인 입학식 날을 기념했다. 나는 반드시 고시에 붙어 우리 가족도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연한 각오로 사진을 찍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온 뒤 구입해 둔 법서 표지 첫 면에 "재학 중 절대 합격"이라고 적었다. 법대 졸업하기 전 4학년까지 사법시험에 합격하자는 각오였다. 28세에 입학한 것이고, 경제적 여건도 어려웠기에 수험생활을 오래 하면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법의 기본이라는 곽윤직 교수님의 민법총칙부터 읽어나갔다. 사시에 합격할 무렵까지 그 책을 100번 이상 읽었다. 1학기 시작되자마자 신입생 신체검사장에서 만났던 법대 선배가 찾아와 성경 공부를 권했지만, 고시 공부를 한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입학 후 보증금이 작은 산동네 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 방안의 창문을 열면 남산타워가 일직선으로 보이는 높은 곳이었다. 낡은 집의 셋방이라서 장판을 들춰보았더니, 방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러면 연탄가스가 스며들 위험이 있어서 잠을 잘 때는 봉창 문을 살짝 열어둬야 했다. 이사한 후 집 주인이 바뀌었는데, 새로운 집 주인은 안방에 불상을 놓고 목탁을 치며 불경을 암송하는 절을 운영했다. 교회를 나가고 있던 어머니는 세입자 입장에서 주인과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미안해했다. 그래서 교회를 갈 때는 근처에 있던 누님 집에 보관해 둔 한복으로 갈아입었고, 집에 올 때는 평상복 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나 역시 인생 목표는 분명했지만, 너무 힘든 삶이라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스스로 교회에 나가 보았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겁고 자꾸 눈물이 나왔다. 어느 날 양복 입은 젊은 분이 나에게 다가와 내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그래서 28세로 법대 1학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분은 "청년부에 넣자니 학생이고, 대학부에 넣자니 나이가 많네!"라고 난감해했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더니, 아무런 연락이나 접촉도 없었다. 신앙생활을 위해서 많은 조언이 필요했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방치된 상태가 되었다.


완연한 봄날이 되자 교정에는 벚꽃과 진달래로 가득 찼다. 처음 맞이하는 캠퍼스의 봄은 왠지 마음이 들뜨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공부하고자 애썼다. 아름다운 자연의 봄은 해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찾아오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내 인생의 봄은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맞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자 도서관에 고정석을 잡아놓고, 재학 중 절대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전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유달리 벚꽃이 만발한 교정의 첫 봄날에 대학의 낭만을 누리지도 못하고 매일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정말 이렇게 여유 없이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차비가 없어서 답십리에서 회기동에 있는 학교까지 1시간이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머니는 인형 공장을 다니고, 형님이 리어카에 세숫대야 등 고무 제품을 가득 싣고 여러 동네로 행상을 다녔다. 나는 그런 형에게서 다소간의 용돈이라도 얻어 쓰는 형편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학교에서는 원주 치악산에 있는 구룡사에서 고시 합숙을 했다. 1학년도 참여하도록 하여 나도 동참했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여 2차 시험을 준비하는 선배들이 하늘처럼 우러러 보였다. 구룡사에서 꽤 떨어진 건물에서 공부를 하고 식사는 절에 가서 하였다. 그런데 사찰 음식은 육류나 생선은 전혀 없고, 나물, 도라지와 같은 반찬이 매일 나왔다. 배불리 먹으니까 포만감은 드는데, 절에서 식사를 하고 공부방으로 돌아오면 배고픈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토끼처럼 풀만 먹으니까 허기져서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절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원주 시내로 나가서 돼지고기와 소주 한 박스를 사가지고 와서 합숙소에서 회식을 했다. 밤새 젓가락을 두드리며 데모 노래와 군가를 합창했다.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이 교대로 오셔서 며칠간 지내기도 하시고, 치악산 정상까지 함께 오르는 추억도 남겼다.


아름다운 치악산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많았다. 여름철이라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계곡에 물이 갑자기 불어나곤 했다. 어느 날 늦은 밤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니, 계곡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물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 중인 피서객이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동료가 실종되었는지, 밤새 어둠 속에서 이름을 불러대는 안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밤 동료와 함께 수영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물가 바위에서 윗옷을 완전히 벗은 상태로 뒤엉켜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두 사람이 꼭 껴안고 있었다. 당연 남자와 여자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아니, 뭐하십니까?"라고 외쳤다. 남의 사생활을 방해한 것 같아 급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다음 날 오전에도 그 근처에서 두 사람은 상하 동일한 복장과 신발을 신고 곁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물 한 쪽에 은퇴하신 노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관상과 사주를 봐주곤 했다. 모두들 고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이라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 노스님을 자주 찾았다. 스님은 어느 학생에게 사주를 봐주면서, 지금 교제 중인 여자 친구와 결혼할지라도 앞으로 이혼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 친구는 엄청 화가 나서 "아니, 스님! 1965년생은 전부 이혼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따지고 들었다. 그 친구는 재학 중에 그때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합숙 중에 산속에서만 있는 것이 답답하여 책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서울 집에 갔다. 한여름에 일하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탄 어머니의 야윈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2학기가 되자 학교는 시위에 휩싸였다. 그런 시위에 갓 입학한 1학년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업도 거부한 채 날마다 대학본관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숫제 가방을 안 들고 빈손으로 등교하는 날도 많았다. 이런 나에게 어머니는 "나는 밥 먹을 때만 앉아 본다. 그런데 너는 가방도 없이 학교 가냐. 열심히 해라." 어머니는 매일 서서 일하고 식사 시간에만 앉아 본다는 것이었다.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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