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 몰라보는 부모가 어딨나"…천경자 화백, 33년 싸움 끝내 패소했다
"내 자식 몰라보는 부모가 어딨나"…천경자 화백, 33년 싸움 끝내 패소했다
그림 진위 여부는 여전히 미궁 속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검찰이 진품이라고 판단한 데 반발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국가배상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다. /연합뉴스
“내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
33년 전, 화가 천경자가 자신의 그림 '미인도'를 향해 던진 이 한마디는 대한민국 미술계를 뒤흔든 논쟁의 서막이었다. 2024년 6월, 어머니의 명예를 건 딸의 마지막 법정 싸움은 국가의 손을 들어주며 끝내 막을 내렸다.
대법원 2부(주심 박영재 대법관)는 천 화백의 딸 김정희 교수가 “검찰의 잘못된 수사 발표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1억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9일 밝혔다.
대법원이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으로, 5년에 걸친 법정 다툼은 유족의 패배로 끝났다.
붓 꺾은 화가, 비극의 시작
'미인도' 논란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순회전에 이 작품을 내놓으며 시작됐다. 천 화백은 그림을 보자마자 단번에 위작이라 선언했다. 10·26 사태로 압수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고에 귀속된 이 그림은, 작가 본인의 강력한 부인에도 미술관과 전문가들의 ‘진품’ 판정을 받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말을 남기고 붓을 꺾은 채 미국으로 떠났다. 화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절필 선언은 '미인도'를 단순한 진위 논란을 넘어 한 예술가의 영혼을 앗아간 비극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과학 동원한 검찰 ‘진품’ vs 유족 ‘명예훼손’
논쟁은 2015년 천 화백의 별세 후 다시 불붙었다. 유족은 “위작을 진품이라 주장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 등을 고소·고발했다. 2016년, 검찰은 8개월간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X선, 적외선, DNA 분석 등 동원 가능한 모든 과학 감정 기법을 총동원한 검찰의 결론은 ‘진품’이었다.
하지만 유족은 물러서지 않았다. 딸 김정희 교수는 “검찰이 감정위원을 회유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해 천 화백과 유족의 명예를 짓밟았다”며 2019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공무원의 고의나 과실로 인한 손해를 국가가 배상하도록 한 국가배상법에 근거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끝나지 않은 진실 공방
1심과 2심 법원의 판단은 같았다. 재판부는 “검찰 수사 과정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사 전체가 객관적 정당성을 잃을 정도로 위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유족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검찰의 불법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대법원 역시 이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 5년간의 소송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법원의 이번 판결은 검찰의 ‘수사 과정’에 대한 판단일 뿐, ‘미인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최종 결론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림의 진짜 주인은 여전히 법의 심판대 밖에 남아있는 셈이다.
실제로 유족 측은 검찰의 감정서 등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별도의 행정소송에서 승소가 확정돼, 논쟁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