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53)] 저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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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53)] 저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2022. 07. 11 09:27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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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연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 신(神)"이라는 한 교수님의 말에 공감한 뒤, 어머니와 형님의 사별을 겪고 보니 신이 두려웠졌다. /셔터스톡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 1학년 때 어머니와 형님이 같은 날 돌아가신 사건 때문이다. 그 무렵 어머니는 나에게 교회 다니자고 권했다. 그러나 28세에 법대 입학한 나는 빨리 사법시험에 합격하려면 공부에 전념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일요일에도 도서관으로 향했다. 비록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늦은 나이에 법대에 진학하여 겪게 되는 어렵고 힘든 현실을 원망하였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어느 교수님이 "연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 신(神)"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 어머니와 형님의 사별을 겪고 보니 신이 두려워졌다. 신을 원망하는 나의 태도가 불경스런 행위로 판단될 거 같은 두려움도 밀려왔다. 진짜로 신이 있다면 나의 불신을 탓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스쳤다.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신 앞에서 잠잠히 있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의 목사님이 공동묘지까지 함께 와서 장례를 정성스럽게 치러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혈육과의 사별은 끝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동반했다. 엊그제까지 같은 집에서 살아가던 분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로 온 세상이 텅빈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음은 늘 공허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 일하였던 인형 공장에서 어머니께 드릴 마지막 월급을 보내왔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피곤함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돈이었다. 함부로 그 돈을 쓰면 안 될 거 같아 친구에게 어디에다 쓰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친구가 귀한 돈이니까 소중하게 쓰라면서 성경책을 사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 돈도 보태어서 '관주 톰슨성경'을 사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어떤 성경이 나에게 읽기 적합한 책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구입했던 성경 첫장에 당시의 심경을 적어 놓았다.


일생을 남편과 그의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시다

세상을 떠난 어머님의 마지막 봉급과

친구 심수명의 도움으로

이 책을 마련하다.

영원히 어머님의 사랑과

친구의 우정이 기억될 것이다.

1985. 1. 4.


자비하신 예수여! 내가 사람가운데

의지할 이 없으니 슬픈 자가 됩니다.

맘이 어두웠으니 밝게 하여 주소서.

저를 보호하시고 항상 인도하소서.


법대 1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하는 고시합숙에 참여하였다. 서울 구파발 근처에 있는 고시원에서 학교에서 선발한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방학 내내 공부하였다. 겨울에 내린 하얀 눈으로 덮인 무덤들을 보면 그냥 눈물이 흐르는 시간이었다. 그 고시원에서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niversity Bible Fellowship)에 나가는 법대 선배를 만났다. 그래서 법대 2학년이 되던 1985년부터 UBF에 나가게 되었다. 내 신앙생활의 시작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매주 한 번씩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간이 흘러 내가 변호사가 되었을 때, 활동하던 선교단체는 침체국면에 접어들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목회자도 아닌데 신앙 문제로 머리 아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서 갑작스럽게 전남 해남으로 법률사무소를 옮겼다.


서울을 떠나 해남으로 내려올 때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려고 했다. 교회생활은 가능한 멀리하고, 최소한 일요일에 한번 가는 수준으로 하거나, 웬만하면 안 나가는 것도 좋을듯싶었다. 그러던 차에 해남에서 일을 시작하던 첫날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건으로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대로 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메말라 버린 신앙심을 회복하자고 다짐했다.


그 후 전남대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광주 UBF로 나가게 되었다. 가족들은 광주에서 살고, 나 혼자 해남에서 지냈다. 오로지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 것이다. 뭔가 하나에 빠지면 그것에 전념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주말에는 광주로 올라가서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냈다. 전남대 학생들은 '광주의 하버드'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스스로들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민주화를 이끌어가는 빛의 도시에 산다는 의식도 강했다. 대학생들도 진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말투였고, 억새처럼 질기면서도 분명하게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들로 보였다. 나는 강진에서 20세에 서울로 올라가서 거의 20년 이상을 지내다 내려왔기에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광주와 해남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의 의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아무튼 나는 대학 입시철을 맞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1학년 학생과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가 배웠던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이라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여름에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선교사들이 개최한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법률사무소를 비워두고 출국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손해가 생기면 감내하자는 마음으로 갔다. 모임을 마친 후에는 LA로 이동하여 주변에 있는 대학들을 둘러보았다. 선교사들과 만나 관심쏟고 있는 일도 듣게 되었다. 선교센터를 건축하자는 논의가 있고 각자 헌금을 내기로 약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필요한 액수의 10%는 내가 감당하자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총 예산이 6억원 가량이 소요될 것이라고 하여, 나는 상당한 액수를 내겠다고 약정을 하였다. 모두들 뜻을 합하여 하는 일이라 너도나도 스스로 헌금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넉넉하지 않는 형편 속에서도 열정이 넘쳐났기에 손쉽게 건축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1961년 생긴 선교단체가 40년 정도가 지나다 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내가 보니까 선교단체 설립자의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져 있었다. 2,000년 전후하여 선교단체의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개혁파와 보수파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세력다툼으로 번져갔고, 전국에 휘몰아치던 개혁의 움직임이 광주까지 밀려왔다. 어떻게 갱신을 이룰 수 있을까 밤새워 토론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는 중 실망한 사람들은 선교단체를 떠났다. 건축을 하자는 것도 중단되었다. 건축헌금 명목으로 돈을 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였다. 어떤 분은 건축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목적으로 헌금한 돈은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다른 분은 어떤 명목으로든 하나님에게 드린 헌금이니까 다시 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각자의 선택에 맡기기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 결국 헌금을 찾아가든, 그렇지 않든 헌금을 했던 사람이 결정하도록 했다. 서울에서 해남으로 내려올 때도 선교단체 생활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는데, 광주에서는 선교단체 자체가 개혁파와 기존의 보수파가 완전하게 갈라지는 일을 겪었다. 더 이상 그곳에 나가서 무익한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 여름에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던 선교단체를 나와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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