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병원에서 '맞았다'가 아닌 '넘어졌다'고 말하는 이유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병원에서 '맞았다'가 아닌 '넘어졌다'고 말하는 이유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 속 한 대목 "가정폭력으로 온 여성 대다수는 '넘어졌다'고 말한다"
의사 출신 변호사와 '팩트체크'를 해봤다

외상 외과 전문의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에는 누가 봐도 맞아서 생긴 상처지만, 어떻게 다쳤냐고 물으면 "넘어졌다"고 대답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보험'에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맞아서 생긴 사고로 치료받는 경우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보조해주지 않는다. 가정폭력에 대한 사실을 숨기다가 보험 처리가 확인되고 나면 (그제서야) 구체적인 경위를 털어놓는다."
외상(外傷) 외과 전문의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분명히 어디선가 심하게 맞아서 생긴 상처인데도 '어떻게 다치게 됐느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넘어졌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맞아서 생긴 사고'로 치료받을 때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보조해주지 않을까. 의사 출신으로 실제 환자들을 많이 접해봤던 법무법인 우성 정필승 변호사는 "사실이다"며 "많이들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했다.
현행 법률(국민건강보험법 제53조)은 국민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적으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를 열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범죄행위'가 원인이 돼 다친 경우다.
이 교수 책의 예시와 같이, 남편이 아내를 의도적으로 때린 가정폭력 사건의 경우 아내는 국민건강보험으로부터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 정 변호사는 "접수할 때 '맞았다'라고 하면 상해로 처리돼 비보험으로 처리된다"고 밝혔다. 비보험이면 치료비는 자가 부담이다.
정 변호사는 "그렇기 때문에 경험상 남편에게 맞아서 병원에 오는 여성들은 '상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 책에 등장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은 결국 이렇게 털어놓는다.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제가 배운 것도 딱히 없고 애들도 아직 어려서 아빠가 필요해요. 이걸 문제 삼으면 이혼해야 하는데, 막상 이혼하면 먹고사는 것도 막막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어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부부는 경제공동체다. 남편의 돈이 곧 아내의 돈이고, 아내의 돈이 곧 남편의 돈이기에 둘은 한 꾸러미에서 비용을 지출한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 아래 상해 치료를 받으면 치료비의 90% 이상은 공단이 부담한다. 하지만 상해의 원인이 가정폭력으로 드러날 경우 치료비 전부가 개인 부담이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그 치료 비용은 다치게 한 사람(가해자)이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에서다.
가해자가 가족이 아니라면 일단 자기 돈으로 치료받은 뒤에, 가해자에게 돈을 청구하면 된다. 하지만 가해자가 자기 남편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정 변호사는 "환자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실무적으로 의사는 '그게 맞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추궁할 능력이나 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