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본인이 알 것"...피해 신고 없는데 내 계좌 묶어버린 은행, 왜?
"이유는 본인이 알 것"...피해 신고 없는데 내 계좌 묶어버린 은행, 왜?
피해 신고 없는데도 은행 자체 판단으로 지급정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고객님 계좌 지급정지 해놨습니다. 이유는 본인이 가장 잘 아실 거예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A씨는 은행으로부터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았다. 다른 은행으로 1700만원을 이체한 직후, A씨는 한순간에 잠재적 범죄자가 되어 자신의 돈에 손도 댈 수 없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A씨는 9일, A은행 계좌에서 B은행 계좌로 1700만원을 옮겼다. 그러자 B은행 금융사기 모니터링팀에서 전화가 걸려와 다짜고짜 계좌가 정지됐다고 통보했다.
평생 불법적인 일에 연루된 적 없던 A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고객센터에 문의했지만 “모니터링팀이 정지시킬 수 있다. 피해자가 신고한 것은 아니다”라는 애매한 답변만 돌아왔다.
다음 날 은행을 찾은 A씨는 ‘소명자료를 제출하라’는 요구에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묻지도 못한 채 가능한 서류를 모두 준비해 제출했다. 하지만 은행의 태도는 완고했다.
모니터링팀은 다시 전화를 걸어 “어떤 자료를 제출해도 지급정지를 풀어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A씨가 이유를 재차 묻자 “예를 들어 고객님이 받은 돈이 보이스피싱 피해 자금일 수도 있다”며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서까지 찾아갔지만, A씨 계좌로 접수된 피해 신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피해자도 없는데…은행은 왜 계좌를 묶었나?
A씨가 받은 ‘지급정지 사실 통지서’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다. 지급정지를 요청한 금융회사 칸이 공란이었던 것이다. 이는 외부 기관이나 피해자 신고가 아닌, 돈을 받은 B은행이 자체적으로 A씨의 계좌를 의심 거래로 판단해 동결했음을 시사한다.
여러 변호사들은 이 지점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법무법인 태강의 조은 변호사는 “전자문서상 지급정지를 요청한 금융회사란이 공란이라면 이는 다른 은행이나 외부 신고가 아니라 B은행 내부 모니터링팀의 자체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법무법인 한일의 이광섭 변호사 역시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가 성행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추세”라며 “A씨의 거래 패턴이 기존과 다르다고 판단해 계좌를 동결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현행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금융회사가 사기이용계좌로 의심될 경우 피해자 신고 없이도 자체 판단으로 지급정지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인 셈이다.
묻지마 지급정지, 법적으로 문제 없나?
문제는 은행의 대응 방식이다. 변호사들은 은행의 조치 자체는 법적 근거가 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고객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바로 ‘소명권(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증명할 권리)’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기윤 법률사무소의 김기윤 변호사는 “구체적인 사유 설명 없이 ‘본인이 알 것 아니냐’는 식의 모호한 태도는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법률사무소 새율의 최성현 변호사 역시 “전자금융거래법상 금융회사는 지급정지 시 그 사유를 고객에게 통지해야 하며, 고객의 소명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현재 상황은 적법절차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 역시 관련 결정(2019헌마579)에서 “계좌 명의인은 입금받은 돈이 정당한 권원에 의해 취득한 것임을 객관적인 자료로 소명하여 지급정지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고 지급정지를 종료시킬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A씨의 경우처럼 소명자료를 내도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대응은 이러한 헌법적 권리를 무시하는 처사로 해석될 수 있다.
내 돈 돌려받으려면…어떻게 싸워야 하나
A씨처럼 억울하게 계좌가 묶인 경우,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변호사들은 보다 적극적인 법적 대응을 주문했다.
가장 먼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은행 본점이나 금융감독원에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다. 법무법인 창세의 김정묵 변호사는 “금융감독원에 이의신청을 제기할 수 있다”며 “경찰에서 피해 접수 사실이 없음을 확인받았다면 그 사실을 서면으로 받아 은행에 제출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법무법인 명의의 내용증명을 보내 은행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다. 법무법인대한중앙의 조기현 변호사는 “내용증명을 통해 즉시 계좌 정지를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불응 시 소송비용까지 부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소송 전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후의 수단은 소송이다. 변호사 서아람 법률사무소의 서아람 변호사는 “법원에 지급정지 해제 가처분을 신청할 수 있다”고 말했고, 다른 변호사들 역시 부당한 지급정지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가능성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