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1)] 돈이 없으면 다닐 곳이 못 됐던 그곳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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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1)] 돈이 없으면 다닐 곳이 못 됐던 그곳 '학교'

2020. 02. 11 12:03 작성2020. 02. 11 12:05 수정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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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매번 경리과에 끌려가서 학비독촉을 받아야 했다. 돈이 없으면 학교는 다닐 곳이 못 되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고교 졸업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은 다음 날 사직원을 제출했다. 증거물과에 새로 부임해 온 과장은 오전에만 근무하고, 오후에는 압수물 보관창고에서 공부하라면서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분은 동사무소 직원을 하다가 법무부 공무원이 되어 야간대학을 졸업한 후 최연소로 검찰 서기관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도 그런 길을 걷도록 권했지만, 사직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사무국장도 사직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가정형편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야간대학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면서 사직을 재고하라고 권면했다. 당시 내 형편을 생각할 때, 사무국장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백번 맞는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사직원을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검찰 공무원 생활은 막을 내렸다. 공무원이 되려고 거의 3년 동안 준비하여 들어갔는데, 근무 기간은 2년 반 정도 하다가 그만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사법시험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내가 왜 그토록 고시합격에 사로잡혔는지를 되돌아보려고 한다.


유난히 학교와 인연이 좋지 않았던 나는 초등학교도 9세에 가고, 모두들 진학하는 중학교도 못 가고 나무꾼으로 지내야 했다.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걷던 중에 멋진 중학교 교복을 입은 친구를 만날 때면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밀려왔다. 교복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주눅 든 거 같았다. 다행히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던 누님의 도움으로 그다음 해에 중학교 입학했다.


그런데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매번 경리과에 끌려가서 학비독촉을 받아야 했다.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을 보는데, 경리과 직원이 교실에 들어와 등록금 미납자를 호출하였다. 나 역시 호출당하여 시험 보던 중에 경리과로 갔다. 경리과장은 "학비도 안내고 학교 다닐 셈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주판으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지금 당장 집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오든지, 학비를 가져오든지 하라고 야단쳤다. 납부금을 안 내면 시험도 못 보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동안 수치를 당하고서 교실에 돌아와서 시험을 보려고 하니, 시험지 상단에는 '납부금 미납자'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돈이 없으면 학교는 다닐 곳이 못 되었다.


중2 때 장래 희망을 고민하던 중 여름방학 무렵에 친구가 법원에 근무하는 친척이 주었다는 법원의 부전지를 보여주었다. 메모지 같은 조그만 종이에 붉은색 글씨로 '광주지방법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형근이 너는 공부 잘하니까 사법고시 붙을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사법고시라는 시험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대와 설렘이 밀려왔다. 그 일을 계기로 장차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자는 꿈을 품게 되었다. 고등학교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려운 형편으로 이내 포기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집에서 혼자 고교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하였다. 고교 과정 책을 사러 강진 읍내에 있는 서점으로 갔다. 고등학교 책을 달라고 했더니 서점 주인이 "문과냐, 이과냐?"고 물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 나는 "문과, 이과 책 전부 주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주인이 골라주는 책을 전부 샀다. 한 가방 가득한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고 흥분되었다. 날마다 집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런 나를 본 중학교 선생님은 "광주로 올라가서 학원에 다니면서 준비를 해라"고 조언해 주기도 했다. 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 학원에 다닐 형편도 안되었다. 고교 진학은 못 했지만 고등학교 교복과 모자는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장흥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장흥고 모자와 단추 등을 구입하여 혼자 방에서 입고 폼을 잡아보곤 했다. 어디 한군데 구겨진 곳 없는 새 옷과 모자인데도, 그걸 입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용기를 내서 고교 교복과 모자를 쓰고 광주에 있는 교육청에 가서 그해 검정고시 원서접수 날짜를 물어보려고 했다. 일요일은 내가 공부하지 않고 쉬는 날이라서 그날 교육청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라디오에서 그날 "광주상고에서 검정고시를 시행하는데, 몇 명이 응시하였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바로 그날 검정고시를 보고 있었다. 홀로 지내다 보니 원서 접수도 못 하여 응시도 못 했다. 비록 남의 학교 교복이라도 입고 첫 외출을 해보려던 것도 허사가 되었다. 검정고시에 응시할 수 없어 다소 낙담이 되었지만, 어차피 검정고시에 합격해도 대학을 가지 못할 바에야 고교졸업 자격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사법시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책을 사려고 광주 큰 서점으로 갔다. 서점 주인은 나에게 "누구의 책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책의 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누구 책이든 상관없이 사법시험 과목 책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책꽂이 맨 꼭대기에 꽂혀 있던 먼지 쌓인 책을 꺼내 주었다. 고시생들이 많이 보는 책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 나로서는 두툼한 법서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마음 설레고 좋았다. 여러 권의 책을 가방에 잔뜩 담아서 집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드디어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것으로 기뻤다. 그리고 고시 공부는 절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집을 떠나기로 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인적이 끊긴 높은 산길을 가로질러 대구면에 있는 정수사라는 절로 갔다. 주지 스님은 한 달에 10만원을 줘도 하숙은 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흥군 천관산에 있는 탑산사를 소개해 주었다. 친구들이 고1 때 어머니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나는 책을 짊어지고 깊은 산사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 절의 스님에게 "공부를 저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뭐라고 할 것이요. 지 하자는 대로 해줘야제…" 스님은 하숙비로 만원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올 거니까, 집에 올 차비 500원을 빼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9,500원으로 결정되었다. 깊은 산속에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산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했다.


불상이 모셔진 불당 곁에 있는 방이 내가 공부할 장소였다. 방 안에는 나무로 조잡하게 만든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창밖에는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산허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두 개의 촛불을 켜놓고 어둠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늦가을 산사의 아침은 매우 추웠다. 차가운 계곡물로 세수를 하였다. 집이 그리우면 천관산 정상 구룡봉에 올라 집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리고 서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청운의 꿈을 펴게 될 날을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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