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갚겠다는 각서에 동업자 이름 적어낸 꼼수, 법원은 꿰뚫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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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갚겠다는 각서에 동업자 이름 적어낸 꼼수, 법원은 꿰뚫어 봤다

2025. 12. 10 13:13 작성
조연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yj.jo@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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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필로 쓰고 지장 찍었다면 오기(誤記)라도 효력 인정

법원 "공동으로 빌린 돈, 연대하여 10억 7200만 원 배상하라"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수십억 원의 돈이 오가는 차용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 한 장, 바로 '처분문서'다. 그런데 돈을 빌려 간 채무자가 갚기로 약속한 각서를 쓰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동업자의 이름을 적어 냈다면 이 문서는 법적 효력이 있을까.


채무자는 실수였다고 항변하거나 본인의 이름이 없으니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은 문서의 형식적인 기재보다 작성 당시의 정황과 실질적인 의사를 더 중요하게 봤다. 설령 남의 이름을 적었더라도 본인이 직접 내용을 작성하고 지장을 찍었다면, 그 빚은 온전히 갚아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제1민사부(재판장 박대산)는 최근 원고 A씨가 피고 B씨와 C씨를 상대로 제기한 약정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업 자금이다" 속이고 빌린 45억, 알고 보니 개인 빚 탕감용

사건의 발단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고 A씨는 농협에 물품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던 피고 B, C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사업 자금이 부족하니 돈을 빌려주면 수익을 내 갚겠다는 것이었다. A씨는 이 말을 믿고 지인 D씨의 계좌를 통해 피고들에게 총 45억 3126만 원이라는 거액을 건넸다.


하지만 피고들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들은 빌린 돈을 약속한 사업 자금으로 쓰지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채무를 변제하거나 임의로 사용해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상환을 독촉했고, 결국 양측은 2017년 7월 24일, A씨의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피고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물품 대금 목적으로 돈을 빌렸으나 갚지 못한 점을 인정한다"며 "2018년 3월 24일까지 특정 금액인 10억 7200만 원을 갚겠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작성해주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이 약정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묘한 '오기'였다.


"각서인은 B"... 옆에서 그대로 따라 쓰다 본인 이름 빠트린 C

약정서 작성 당시, 피고 B씨가 먼저 각서를 작성했다. 문제는 그 옆에 있던 피고 C씨였다. C씨는 B씨가 쓴 약정서 내용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문서의 작성 주체를 밝히는 '각서인'란에 자신의 이름인 'C'가 아닌 'B'의 이름을 적었다.


결과적으로 C씨가 A씨에게 건넨 약정서에는 내용은 '돈을 갚겠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각서인 이름은 엉뚱하게도 동업자 B로 적혀 있는 상황이 연출됐다. 다만 C씨는 해당 문서의 '채무자 C'라고 적힌 부분 옆에 자신의 지장(무인)을 분명히 찍어서 건넸다.


약속한 변제 기일인 2018년 3월 24일이 지났지만, 피고들은 돈을 갚지 않았다. 이에 A씨는 피고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민사 소송을 통해 약정금 10억 7200만 원을 돌려달라고 청구했다. 재판의 쟁점은 명확했다. 남의 이름(B)을 각서인으로 적은 C씨의 약정서가 과연 유효한가, 그리고 이들이 연대하여 돈을 갚을 의무가 있는가였다.


재판부 "이름 잘못 썼어도 지장 찍었다면 변제 의사 명백"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사건번호 2025가합491)은 문서의 형식적 하자보다 '진정한 의사'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피고 C씨가 비록 각서인란에 B의 이름을 적었지만, 이는 B가 작성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 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만약 피고들의 진정한 의사가 피고 B 혼자서만 돈을 갚는 것이었다면, 굳이 C가 같은 내용의 약정서를 자필로 또 작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C가 자필로 약정서를 작성했고, 자신의 이름 옆에 무인을 날인한 만큼 해당 약정의 주체는 피고 C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즉, 이름 기재에 실수가 있었더라도 자필 작성과 지장 날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채무를 승인하고 변제하겠다는 의사가 분명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피고 B씨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아무런 다툼을 하지 않아 자백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C씨는 재판에 나오지 않아 공시송달로 처리됐다.


법원은 최종적으로 "피고들은 연대하여 원고에게 10억 7200만 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변제 기일 다음 날인 2018년 3월 25일부터 2025년 1월 31일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지연손해금도 함께 지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채무 관계에서 문서의 사소한 흠결을 빌미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법원은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약속과 행위에 법적 무게를 둠으로써, 10억 원이 넘는 거액의 채무에 대해 엄정한 연대 책임을 물었다.


[참고]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25가합491판결문 (2025.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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