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 책상에 '체모 테러'한 50대 임원, 성범죄 아니라 '재물손괴'라는 수사기관
여직원 책상에 '체모 테러'한 50대 임원, 성범죄 아니라 '재물손괴'라는 수사기관
피해자 홈캠에 잡힌 범인은 "딸처럼 아낀다"던 상사
신체 접촉 없었다며 성범죄 불송치

여직원 책상과 옷에 자신의 체모를 반복적으로 뿌린 50대 임원이 경찰 수사를 받았지만, 성범죄가 아닌 재물손괴 혐의만 적용돼 논란이 일고 있다. /셔터스톡
여직원 책상과 옷에 반복적으로 자신의 체모를 뿌린 50대 남성 임원이 경찰 수사를 받았지만, 성범죄가 아닌 재물손괴 혐의만 적용돼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8월, 인천의 한 업체에서 근무하는 30대 여성 직원 A씨는 출근할 때마다 자신의 책상 위에서 정체 모를 체모를 발견했다. 노트북 사이, 마우스 패드 위, 심지어 의자에 걸어둔 근무복 주머니 안에서도 불쾌한 체모가 잇따라 나왔다.
극도의 공포를 느낀 A씨는 사내에 CCTV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자신의 자리에 개인용 홈캠을 설치했다. 영상에 찍힌 범인의 정체는 충격적이었다. 평소 A씨를 "딸처럼 아낀다"고 말하던 50대 임원 B씨였던 것이다.
B씨는 A씨가 출근하기 10분 전쯤 빈자리에 접근해 자신의 체모를 뿌리고, 마우스에 이물질을 묻히듯 손을 비비는 기괴한 행동을 일삼았다.
범행이 발각되자 B씨는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호기심이었다"는 황당한 변명을 남기고 회사를 그만뒀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 없으면 성범죄 성립 안 돼
참다못한 A씨는 B씨를 성폭력처벌법 위반, 스토킹처벌법 위반, 모욕, 재물손괴 등 4가지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중 '재물손괴' 혐의만 인정해 검찰에 넘겼다.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누가 봐도 성적 불쾌감을 주는 행동이지만, 왜 성범죄가 성립하지 않았을까. 2일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에 출연한 우지형 변호사(로엘 법무법인)는 현행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우지형 변호사는 "우리 형법상 강제추행이나 성범죄가 성립하려면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있거나, 폭행 또는 협박이 수반되어야 한다"며 "하지만 이 사건 가해자는 피해자가 없는 빈자리에서 물건을 대상으로 범행했다"고 설명했다.
물리적인 강제력 행사나 신체 접촉이 없었기에 법리적으로 강제추행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수사기관의 전형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어 우지형 변호사는 "현행 실무에서는 가해자 체액이나 체모가 피해자 신체에 직접 닿거나, 피해자가 착용 중인 옷에 묻었을 때 비로소 추행 가능성을 검토한다"며 "옷을 벗어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은 사람이 아닌 물건을 대상으로 한 행위가 되어버리는 입법 공백 상태"라고 덧붙였다.
반복된 범행인데 스토킹·모욕죄 적용도 어려워
수개월간 반복된 범행임에도 스토킹처벌법이 적용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우지형 변호사는 "스토킹처벌법상 물건 등을 두는 행위는 명백한 스토킹의 한 유형"이라면서도 수사기관의 소극적 해석을 원인으로 꼽았다.
우지형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가해자 행위가 피해자 생명이나 신체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고 보거나, 체모를 법령상의 물건으로 보기에 소극적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판례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성범죄를 적용했다가 무죄가 나올 경우 수사기관이 겪을 부담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봤다.
모욕죄 역시 성립이 어렵다. 우지형 변호사는 "모욕죄가 성립하려면 공연성, 즉 불특정 다수가 알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며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빈 사무실에서 은밀하게 범행했고, 피해자만이 그 결과를 확인했기 때문에 제3자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아 공연성 미비로 처벌이 어렵다"고 했다.
물건 대상 성적 괴롭힘 처벌 조항 신설해야
형사 처벌과 별개로 직장 내 징계 사유로는 충분하다.
우지형 변호사는 "노동법상으로는 명백한 직장 내 성희롱이자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며 "남녀고용평등법상 성희롱은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모든 언동을 포함하며, 반드시 신체 접촉을 요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여성 동료의 텀블러에 체액을 넣은 공무원이 형사적으로는 재물손괴 판정을 받았음에도 행정적으로는 해임 처분을 받은 사례가 있다.
대학 도서관 신발 테러, 시내버스 머리카락 체액 사건 등 유사한 범죄들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 재물손괴죄만 적용돼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결국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입법이 시급한 상황이다.
우지형 변호사는 "성폭력처벌법에 물건을 대상으로 한 성적 괴롭힘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체 접촉이 없더라도 성적 수치심을 줄 목적으로 타인의 물건에 오물을 바르거나 배설하는 행위를 명확히 성범죄로 규정하여, 성범죄자 알림e 등록이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수강 같은 보안처분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우지형 변호사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가 재수사를 요청한 만큼, 스토킹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 전향적인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약 30~40% 정도 열려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