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21)] 대학원 진학에 나이 제한을 한다고?
[정형근 교수 에세이 (21)] 대학원 진학에 나이 제한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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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날 많은 사람이 학교를 가득 메웠다. 4년 전 입학할 때는 온 가족이 모두 와서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하였는데,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렇게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 졸업했다. /셔터스톡
졸업식 날 많은 사람이 학교를 가득 메웠다. 하얀 장갑에 꽃다발을 든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입은 콤비 차림이 어색하다고 느끼면서 혼자 도서관 앞을 서성거렸다. 누군가 올 것 같아 사람들 사이에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다행히 친구 어머니가 졸업을 축하하러 오셨다. 4년 전 입학할 때는 온 가족이 모두 와서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하였는데,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 없었다. 스산하게 불어대는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 졸업했다.
'재학 중 절대 합격' 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 목표는 아련히 멀어지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빈손으로 졸업했다는 생각 때문에 방황하고 힘들어했다. '왜 학교를 와서 이런 고통을 겪나' 싶었다. 차분히 시험공부 할 여유를 되찾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지냈다. 1988년 사시 30회 1차 시험은 1만 3568명이 지원하여 818명이 합격하였다. 1차 커트라인은 82.18점이었는데, 나는 4문제 차이로 떨어졌다. 한 해 전에는 6문제 차이로 낙방했는데, 1년 공부하여 객관식 문제 2개 더 맞춘 것이다. 졸업생으로 1차도 붙지 못하자, 학교 고시원에서 나와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갈 곳도 없었다. 돈도 없어 공부를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에게 사법시험은 젊은 혈기 때 한 번쯤 품어본 꿈에 불과해 보였다.
그럼에도 시험에 다시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도했다. 어느 여름날 밤, 힘든 마음 상태를 회복하려고 학교 도서관 곁에 있는 조그만 동산 입구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조용히 기도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단 몇 초도 되지 않은 순간에 동산 숲속에서 꽹과리, 징, 장구와 같은 악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일어난 후 그 장소를 벗어나고자 달렸다. 도서관 앞으로 달려가면서 풍물패 동아리 학생들이 이 밤에 숲속에서 연습을 하나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내가 급히 자리를 피하여 도서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 도서관 앞에 있던 후배가 나를 보더니, 왜 그리 놀란 표정이냐고 물었다. 그때 워낙 힘든 상태라서 헛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나의 사정을 안 선교단체에서는 모임에 사용하던 회의실 테이블에서 취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한여름에 배낭으로 책을 가득 담아 학교 고시원을 나왔다. 마치 중학교 졸업하고 고시 공부한다고 천관산 탑산사로 들어가던 때와 같았다. 그 테이블에서 밤늦게까지 모임을 하고 있으면, 그 모임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새벽에는 모임을 하려고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일찍 자리를 비워 주어야 했다. 생활비는 직장 다니는 분들이 갹출(醵出)하여 준 7만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였다.
가을이 되어 추워지자 후배의 자취방으로 옮겼다. 지독하게 추운 방이었다. 식사는 학교 고시원에서 하였다. 이른 아침에 세찬 눈보라를 맞으면서 고시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행히 모의고사 성적이 좋아 겨울방학 때부터 다시 고시원에 들어갔다. 정말 공부에 전념했다. 기력이 쇠하여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공부가 잘되는 느낌이었다. 도서관에서 가장 늦게 퇴실한 후 센터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다시 고시원으로 되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1차 시험 84일 남은 날 일기
내가 붙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나름대로 하고서도 실패했던 작년을 돌아보니 불현듯 염려가 든다. 믿음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나의 능력이 뛰어남이 없고 암기 위주의 1차에 약점이 있고, 세 번이나 실패한 상처로 인함과 불안한 거처 문제와 경제력 문제 등으로 결과 여부에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일 수는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의 모든 약점을 감추시고 마음속의 믿음을 보시고, 합격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믿음의 눈으로 보기 보다가도 불신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제까지 사시 준비로 인도하신 손길과 믿음의 끈을 굳게 잡고 일어서는 과정들을 건너가야 한다. 합격이여! 속히 오라!
학교의 1차 모의고사에서 평균 81.25점으로 1등을 하였다. 그 무렵 전두환 대통령이 헌법개정을 거부한 것에 대한 호헌철폐 데모가 불처럼 일어났다. 그 후 얼마 후에 있던 1차 시험을 마쳤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 좋은 소식이 있으면 후배에게 알려 달라고 했음에도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극장을 나와 종로로 갔다. 광화문에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사진이 실린 책을 꺼내어 눈여겨보았다. 오직 합격자 발표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국밥을 사 먹고 힘을 냈다. 명동 쪽으로 걸어가 대한극장에서 월남전 영화를 보았다. 눈은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은 초긴장이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고시는 끝장인데... 제발, 제발.
극장을 나와서 서울신문이 나와 있을 가판으로 향했다. 종각 부근으로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중간에 학교 후배를 만났다. 그 후배가 발표 소식을 혹시 알고 있나 싶어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애타는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종로서적 앞에서 합격자 명단이 실린 서울신문을 샀다. 손이 떨려 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흥분된 가운데 어느덧 명단이 실린 면이 펼쳐졌다. 내 이름 석 자가 선명히 나와 있었다. 합격이었다. 아! 이런 건가! 감격에 눈물이 흐르고, 흥분되었다. 평균 78.75점이었고, 내 점수는 80.93점이었다. 지원자 1만 3429명 중 714명이 합격했다.
4번 응시 끝에 1차 시험에 합격했다. 33세였다. 학교에서 마련한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2차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점심때 뒤늦게 식사하러 온 선배가 "앞으로는 나이 먹으면 대학원 진학도 못 할 거 같다. 서른이 넘으면 대학원 진학을 못 하게 나이 제한을 할 모양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33세에 이르러 있는 내 나이를 떠올렸다. 대학원 갈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 나이 제한을 하면 영원히 진학의 길이 막힐 것이라는 두려움이 갑자기 밀려왔다. 그 순간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나도 모르게 식사를 하다 말고 즉시 일어났다. 그리고 교문 앞으로 달려갔다. 입학원서에 붙일 사진을 급히 찍은 다음, 대학원 행정실로 갔다. 그날이 대학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법학 석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는 사시 1차에 합격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기에 학비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대학원 진학에 나이 제한은 없다. 지금 변호사 개업 중인 그 선배(민덕기 변호사)는 나중에 나에게 "그냥 농담으로 그랬다"고 태연히 말했다. 검찰청 다닐 때 사법시험 응시에 '학력 제한'을 할 것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대학에 입학했는데, 대학원은 '나이 제한'을 할 것이라는 농담을 듣고 진학을 한 것이다. 나의 최대의 약점이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 추석이 다가왔다. 연휴 3일 동안 기숙사 문을 닫는다. 명절이 되면 모두들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없는 텅 빈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었다.
9월 14일 추석
추석이다. 차라리 명절이 없다면 부모 없는 도토리 같은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괴롭고 외로운 혼자의 길이라면 고시를 생각지 말았어야 했었다. 그냥 소박하게 검찰청에 다녔어야 했다. 왠지 마음을 무겁게 내리는 누르는 미칠 것 같은 고독감이... 어딘가 가고 싶지만 갈 곳이 있나? 서성이자니 피곤하고... 그래서 다시 도서관에 들어왔다. 교문 입구에는 이번 사시 2차 합격자의 축하 명단에 낯익은 이름이 가득하나, 아무리 봐도 내 이름은 없다. 바라건대, 내년에는 기쁨의 날을 보내게 도와주세요. 오후에라도 마음을 내리누르고 공부할 맘 주십시오. 그리운 어머니! 따스한 눈길이 그립습니다. 인생의 짐을 죽기까지 힘겹게 지셨던 형님! 못난 동생을 용서하소서. 형의 고난을 헛되지 않도록 이를 악물겠습니다.
마음이 허전할 때면 극장을 찾아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늘 마음속 깊은 외로움에 힘이 빠지고, 그런 사념에 젖어 있는 것으로 결국 공부에 전념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몸과 마음이 빠져들었다.
초조한 가운데 1990년을 맞이하였다. 차창을 휙휙 스쳐 가는 가로수처럼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과목으로 마음이 좁아지기도 하였다. 새벽에 상쾌한 공기를 호흡하며 도서관 향하는 기쁨이 컸다. 점차 다가오는 구정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늘 그랬듯이 식사할 장소에 대한 염려와 외로움에 젖지 않고 열심히 공부함으로 명절의 고독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해 1월 하순 민주당과 공화당이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합당하는 소식이 들렸다. 구정이 가까워져 오자 학교에는 모두 귀향을 하고 몇몇 동료들이 남아있었다. 설날 무렵 식사 문제가 외롭게 심부를 파고드는 날에, 새삼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절감하였다. 비록 모진 세파 속에 정다운 이야기 나눈 적은 많지 않지만, 새삼 세상 떠난 어머님과 형님이 뼈아프게 그리워졌다.
1월 27일 토요일
설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중에 마디가 될 특별한 의미를 새긴 날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날을 길이 보존하며 혈육이 만나 즐긴다. 설은 음력으로 1월 1일이다.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이다. 양력 세대라 그리 큰 의미가 오진 않지만, 민속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를 느끼게 한다. 역시 세상 여정에는 쉼이 필요하고 만남이 필요하다. 텅 빈 도서실에서 어제 2시경에 회사법을 마쳤다. 일견했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누님 집에서 도시락 하나 얻어와 고시원으로 왔다.
시험공부 중에도 대학원 수업에 참여하였다.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민사소송법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민소법을 강의하시는 이용훈(당시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후에 대법원장) 교수님은 전임교원이 아니라서 그분의 이름으로 석사학위를 줄 수 없고, 민법 전공 교수님을 통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환경법을 전공으로 하고자 구연창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갔으나 부재중이셨다. 안타깝게도 구연창 교수님은 그해 겨울 세상을 떠나셨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던, 몹시 추웠던 날. 나는 학생대표로 장지까지 따라갔다.
수험생 상태에서 대학원 전공과목을 정하는 것이 급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 정해 놓는 것이라서 결정을 짓는 것이 필요했다. 다음 날 행정법 담당이신 박윤흔 교수님(후에 환경부 장관)을 찾아가 뵙고 행정법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더니, "대학원 졸업보다 고시 합격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먼저 시험 합격부터 해라"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어렵게 시험공부를 하는 것을 아시고, 그 무렵부터 합격할 때까지 여러 해 동안 매달 금일봉을 전해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