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15)] 1000만원 빚을 동전으로 갚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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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15)] 1000만원 빚을 동전으로 갚으면?

2020. 11. 04 14:08 작성2020. 11. 04 14:27 수정
호문혁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omoo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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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성실의 원칙

민법에 포함된 일반조항 중 하나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하게 하여야 한다"로,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이라 한다. /셔터스톡

1000만원 빚을 진 채무자가 약속한 날짜에 채권자에게 1000만원을 모두 갚았는데, 그 돈을 모두 100원짜리 동전으로 줬다면. 채권자는 그것을 받아야 할까? 채권자가 안 받겠다고 거절해도 채무자는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을까?


본래는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할 날에 정확하게 빌려간 돈을 모두 갚았으므로(이를 변제라고 한다) 채권자는 그 돈을 받아야 한다. 만일 받지 않더라도 채무자는 채무를 면하고, 채권자의 잘못으로 돈을 받지 못한 것이 된다. 형식적으로 보면 채무자는 빌린 돈을 제 때에 모두 갚았고, 동전으로 갚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계약을 한 적도 없고, 동전으로 갚지 말라는 법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채무자의 변제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위 경우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므로 괜찮고, 채권자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대의 경우를 보자. 5억원에 아파트를 매매하기로 계약을 하였는데, 대금 지급할 날에 매수인이 50만원을 덜 지급하고 열흘 뒤에 마저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매도인이 매수인이 계약대로 매매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계약을 해제한다면 어떨까?


채무자(매수인)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채권자(매도인)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러면 계약은 소급적으로 효력이 없어진다. 매수인이 비록 미미한 금액이지만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계약 불이행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매도인이 계약을 해제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계약에 매매대금의 몇 퍼센트까지 덜 지급한 경우에는 계약을 해제하지 못한다고 정하지도 않았고, 법에도 그런 규정이 없다. 형식적으로 보면 매도인의 계약 해제에 아무런 잘못이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매도인의 권리 행사를 잘 했다고 칭찬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처럼 권리 행사나 의무 이행이 법규정으로 따져 봐도 아무런 흠 잡을 데가 없는데, 그렇다고 그러한 행위를 정당하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나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법전을 편찬해서 국민의 온갖 권리와 의무를 상세히 법규정으로 정해 놓는다. 이러한 법규정들은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온 로마법의 전통을 이어받아 쌓인 유럽 법학의 지혜를 근·현대적으로 다시 꾸며서 조문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법률생활을 거의 빠짐없이 규율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일상생활이란 법조문 보다는 훨씬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어서, 법전에 규정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법에서는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일반 원칙만을 선언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일반조항'이라고 한다. 민법에 포함된 일반조항 중 하나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하게 하여야 한다"로,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이라 하고, 줄여서 '신의칙'이라고도 한다.


빌린 돈을 동전으로 갚은 행위는 신의에 좇은 성실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채권자를 골탕 먹이는 행위여서 채권자는 동전으로 받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다. 미미한 금액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계약을 해제하는 것은 신의에 좇은 성실한 권리행사가 아니라 권리의 남용이 되어서 계약 해제는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상황을 규율할 구체적, 개별적 법규정이 없는 경우에 신의칙과 같은 일반조항을 적용하여 정의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다만, 일반조항은 내용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의에 좇아 성실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조항을 적용하면 구체적으로 요건과 효과를 세밀하게 따질 필요가 없어서 웬만하면 쉽고 편한 일반조항을 활용하려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이를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라고 한다.


법의 해석과 적용은 엄밀하고 명확해야 하는데, 두루뭉술한 일반조항을 함부로 적용하면 법의 해석과 적용이 문란해진다. 구체적, 개별적 조항이 우선적으로 적용되고, 일반조항은 구체적, 개별적 법규정이 없을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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