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없이 콘돔 제거 '스텔싱', 한국에선 왜 범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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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없이 콘돔 제거 '스텔싱', 한국에선 왜 범죄가 아닌가?

2026. 02. 20 16:54 작성2026. 02. 20 16:56 수정
김혜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hj.kim@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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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자기결정권 짓밟은 피임기구 무단 제거, 폭력 없으면 무죄?

법의 사각지대와 '조건부 동의' 입법안 총정리

동의 없는 피임기구 제거 행위인 '스텔싱'은 현행법상 강간죄로 직결되지 않으며,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조건부 동의'를 명시하는 구체적인 입법 보완이 시급하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성관계 도중 상대방 몰래 콘돔 등 피임기구를 제거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이른바 '스텔싱(Stealthing)'이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임신이나 성병 감염의 심각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명백한 배신행위이자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법원은 이 끔찍한 행위를 범죄로 인정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행법 체계에서 스텔싱 행위 자체만으로는 형사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법원이 어떠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기소된 실제 사건들을 통해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안에다 해줘" 카톡 한 통이 가른 판결: 대구지방법원 사건의 전말

먼저 살펴볼 사건은 두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원고 여성 A씨는 사건 당시 피고 남성 B씨가 피임기구를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결국 몰래 피임기구를 제거하는 스텔싱을 저질러 자신의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A씨의 주장과 달랐다. 대구지방법원(2024. 11. 6. 선고 2023나323406 판결)은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단의 핵심 근거는 두 사람이 사전에 주고받은 '메시지'와 '통화 내역'이었다.


사실관계를 짚어보면, A씨는 사건 전날 B씨에게 "안에다 해줘"라는 내용의 메신저를 보내 질내 사정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전 통화 과정에서도 "아기를 갖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전 정황을 토대로, B씨가 몰래 피임기구를 제거하는 기망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폭행이나 협박 등 위법한 수단으로 강제적인 성관계를 가졌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판시했다. 피해자의 이전 발언과 텍스트가 성관계의 방식에 대한 명시적 동의로 해석되면서, 스텔싱 주장이 완전히 무력화된 대표적인 사례다.


거부하는 피해자를 완력으로 제압해야만 범죄?: 수원지방법원 사건

반면, 스텔싱 행위에서 촉발되어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존재한다. 단, 이 사건에서 유죄의 핵심 근거가 된 것은 스텔싱 자체가 아니라 그 직후 벌어진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이었다.


수원지방법원(2020. 5. 21. 선고 2019고합739 판결)에서 다뤄진 사건의 등장인물은 성매매 여성 C씨와 매수남 D씨다. 두 사람은 콘돔 착용을 명확한 전제 조건으로 삼아 성관계를 시작했다. 그런데 성행위 도중 D씨가 몰래 콘돔을 빼버렸다. 이를 알아챈 C씨는 강하게 화를 내며 "한 번만 더 이러면 두말하지 않고 그냥 가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D씨는 다시 콘돔을 착용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재차 몰래 제거했다. 참다못한 C씨가 "나는 두 번은 없다. 갈 거다"라며 D씨를 밀치고 화장실로 피신하려 했다. 문제가 된 강제력은 이때 발생했다. D씨는 도망가는 C씨를 쫓아가 양어깨를 잡고 억지로 침대로 끌고 왔다. 이어 몸 위로 올라타 양팔을 결박하고 강제로 성폭행을 시도했다.


법원은 D씨의 행위를 강간미수죄로 단죄했다. 대전지방법원(2024. 5. 30. 선고 2023고합232 판결)에서도 유사한 사실관계 하에 피고인에게 강간미수죄가 인정된 바 있다. 두 사건 모두 단순히 피임기구를 뺀 기망 행위가 유죄의 직접적 근거가 된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명확한 거부와 이탈 시도에도 불구하고, '유형력(폭행 및 억압)'을 행사해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했기 때문에 비로소 범죄가 성립된 것이다.


폭력 중심의 낡은 법리, 구멍 뚫린 성적 자기결정권

위의 사실관계들에서 보듯, 현재 우리나라 법원은 스텔싱 그 자체를 강간죄로 의율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행 형법 제297조가 강간죄의 성립 요건으로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물리적 강제력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의하에 시작된 성관계라 할지라도 몰래 피임기구를 빼는 비열한 기망이 개입되었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훼손된 것이다. 그러나 현행법의 잣대에서는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뒤따르지 않는 한, 강간죄의 그물망을 쉽게 빠져나가게 된다.


'조건부 동의'라는 법적 쟁점 역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콘돔 사용을 조건으로 성관계에 허락을 구했다면, 콘돔을 뺀 순간 그 동의는 즉각 철회되고 무효가 되는 것이 법리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현행 사법 체계는 이 조건부 동의 위반을 강간으로 직결시킬 명확하고 일관된 해석 기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동의 없는 성관계'로 패러다임 전환, 시급한 입법 과제

결국 해답은 명확하다. 사법부의 소극적인 법률 해석을 지적하기에 앞서, 입법부가 직접 나서 낡은 법의 테두리를 고쳐야 한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성범죄의 판단 기준이 과거의 '물리적 폭력' 중심에서 '성적 자율성'과 '동의 유무' 중심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해외 선진국들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영국 대법원과 캐나다 대법원은 콘돔 사용 조건을 위반한 스텔싱을 각각 강간죄와 성폭행죄로 인정해 처벌하고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이를 민사상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우리나라 역시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 없는 간음'으로 확대 개편하거나, 성폭력처벌법 내에 '조건부 동의 위반 간음'을 처벌하는 구체적인 신설 조항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피임기구 사용 약속을 어긴 행위가 명백한 범죄임을 입법부의 법률로 쐐기를 박아야만 제2, 제3의 억울한 눈물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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