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5)] 드디어, 합격! 합격!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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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5)] 드디어, 합격! 합격! 합격!

2020. 04. 29 14:24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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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합격! 합격!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머니는 시골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독서실에서 고생하는 나에게 밥이라도 따뜻하게 지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도 서울시민이 되었다. 동대문구 답십리에 셋방을 얻었다. 서울로 이사를 한 다음 날 어머니는 덕수궁 구경을 가자고 했다. 시장에서 통닭 두 마리를 튀겨서 갔다. 궁궐 안 잔디밭에 사람들이 앉아 음식을 먹는 곳에서 닭을 먹었다. 그러면서 덕수궁 돌담길 밖에 있는 서소문 검찰청사를 가리키면서 "앞으로 내가 검찰직에 합격하면 저기에서 근무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서울에서 모여 희망찬 생활을 시작하였다.


비좁은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장성한 형제들이 단칸방에서 지내는 것은 불편했다. 나는 매일 새벽 종로구에 있는 정독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했다. 정독도서관이 휴관하면 광화문을 가로질러 사직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으로 갔다. 정말 열심을 냈다. 어느덧 가을이 오고 시험이 임박했다. 시험 전날 밤에 온 들판에 누렇게 익어 있는 벼를 수확하는 꿈을 꾸었다. 시험장소는 경희여고였다. 경희대 교정은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곳을 거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시험을 마치고 나니 합격할 것 같았다. 발표 하루 전날 밤 누님이 공무원 학원에 전화를 하여 합격을 확인하였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합격! 합격!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 얼마나 그리던 순간인가! 어머니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면접시험을 보려고 생전 처음으로 양복을 맞추고 구두도 샀다.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서울고등검찰청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대기 장소는 13층이었다. 필기시험 합격자들이 말쑥한 차림으로 와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책을 펴보거나 조그만 메모지를 읽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책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면접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전 10시경 모이라고 하여 오후부터 면접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후 4시쯤 호명을 받고 9층으로 내려갔다. 면접실에는 검은 법복을 입은 검사 2명이 있었다. 검은 옷이 저승사자 같았다. 면접관은 "왜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무슨 이유로 검찰직에 응시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면접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다 보니 이런 평범한 질문도 낯설었다. 얼굴은 달아오르고 말은 더듬거렸다. 조용히 곁에 있던 한 분이 불쑥 "검사의 직무가 무엇이지?"라고 물었다. "사법경찰관의 지휘·감독, 공소제기권자⋯." 라고 두 마디를 얼떨결에 대답했다.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형의 시효와 공소시효의 기산점이 언제부터이지?" "예! 형의 시효는 형벌이 확정된 때부터이고, 공소시효는 범죄행위가 종료된 때로부터입니다." 그러자 "형벌이 확정된 때가 아니고 형이 확정된 때가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됐어! 가봐!"라고 내쫓듯 나가라고 했다. 불길한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며칠 후부터 어머니와 형님이 다니는 프레스 공장에 나갔다. 다시 시험공부를 하면 필요한 돈이라도 벌 생각이었다. 지금의 장안동 벌판에 있는 공장이었다. 공장 건물이 달랑 한 채가 있고 주변에는 전부 배추밭이었다. 한 가족이 같은 공장에 다니게 되어 속으로는 창피했다. 야근을 하는 날은 중국집에서 들판까지 배달해준 자장면을 먹었다. 밤새 철야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철야 작업 내내 쇳덩이를 옮기면서 맑은 하늘에 펼쳐져 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들판은 한밤중에 보니 더욱 넓게 보였다. 드높은 하늘은 내가 솟아 올라가야 할 창공이었고, 넓은 벌판은 앞으로 달려가야 될 미개척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공장을 다니고 있던 어느 날 법무부 총무과에서 보낸 편지가 왔다. 부고 봉투처럼 만질만질한 노란색 편지였다. "귀하가 최종 불합격자로 판정되었기에⋯." 면접시험의 불합격 통지서였다. 100명을 뽑는 시험에서 필기시험에서 150명을 합격시킨 후 50명을 면접에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나는 혼자 공부해 왔기에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새벽에 정독도서관을 갔다가 밤 10시 무렵 귀가하는 일을 반복했다. 필기시험을 보는 날 밤 맑은 물에서 잉어 3마리를 잡는 꿈을 꾸었다. 3번째 응시하는 것인데 좋은 징조인가 생각했다. 시험장소는 한양대 법대였다. 그 후 합격자 발표를 하는 서소문 검찰청사로 갔다. 덕수궁 정문 근처에서부터 낙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발길이 무거워졌다. 검찰청사 식당 입구의 벽에 합격자 명단이 붙여져 있었다. 수험생들이 그 앞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재빨리 수험번호를 읽어 내려갔다. 내 수험번호 1612번이 명단에 있었다. 합격이었다.


그 후 면접시험은 전부 예상했던 질문이라 무난하게 대답했다. 지난해 면접 떨어지고 1년간 필기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면접시험에 더 큰 신경을 썼다. 면접관이 "중졸인데, 앞으로 공부를 더 할 생각은 없나?"라고 물었다. 예상 질문이었다. 그래서 "직무상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공무원이 되어 공부하겠다고 하면 근무에 소홀하겠다는 것이냐 지적받을 가능성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뒤이어 "'새마음 운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새마음 운동은 1978년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최태민이 주도적으로 벌이고 있던 전 국민적 정신운동이었다. 매일 TV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이 체육관 같은 곳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연히 예상 문제로 뽑아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로 공무원이 되려는 자의 국가관 또는 정신자세를 확인하려는 것임을 직감했다. "네! 제가 공부를 하느라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는 않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시작하여 준비해둔 내용을 담담하게 답변하였다. 그러자 면접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후에도 어떤 질문을 해도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날 면접 때는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마지막에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면접장을 나왔다.


며칠 후에 두툼한 봉투에 합격통지서가 배달되었다. 작년에 받았던 불합격통지서가 들어 있던 얇은 봉투와는 비교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해 가을 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3주간 훈련을 받았다.


태릉 육군사관학교 앞에 있는 육군사격지도단에서 야간경계병으로 근무했다. 격일제로 근무하기 때문에 퇴근 후에는 7급 검찰직을 준비하였다. 지인들은 그런 나를 보고서 인생을 피곤하게 산다고 했다. 무척 더운 여름날에 시험을 보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아침에 일어나니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중앙청에 마련된 조문소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날 오후 부대에 출근하였더니 분위기가 살벌해져 있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우리 부대에 다른 부대가 들어왔다. 파견 나온 부대의 사단장이 부대장실에 있으면서 밤이 되면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량리 일대까지 순찰을 돌았다. 컴컴한 밤중에 사단장이 탄 차량에 붙여진 빨간 별판이 유난히 돋보였다. 매일 밤 서울 시내를 돌고 돌아왔다. 부대 옆 숲속에서는 파견을 나온 수많은 병사들이 텐트를 치고 밤낮없이 군가를 불러댔다.


1979년 12월 12일 밤, 나는 탄약고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자정 무렵에 장교 1명이 탄약고의 문을 급히 열더니, 총과 탄약을 박스에 정신없이 담아 어깨에 메고 본부로 뛰어갔다. 얼마 후에는 부대 밖 도로에서 탱크들이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날밤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정승하 계엄사령관이 연행되었다고 했다. 전두환 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한 밤이었다.


그리고 1980년 4월에 부산지검으로 발령을 받았다. 사법시험 준비하려고 6개월 만에 부산에서 서울지검으로 왔다. 2년 후쯤 사법시험 응시자에게 학력 제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법과대학에 가려고 검찰청을 사직했다.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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