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증이라고 쓰여 있지만, 이건 차용증이 아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판결입니다
"차용증이라고 쓰여 있지만, 이건 차용증이 아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판결입니다
피해자 안심시키려 돈 받으며 '차용증' 써준 사기꾼
그 차용증 흔들며 "빌린 돈이다" 법정서 주장
법원, "실질적으로 차용증이라 볼 수 없다" 판단

사기 혐의로 검찰청에 소환된 그는 당당했다. 받은 돈은 '선물'이거나 '빌린 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입증할 증거를 꺼내 보였다. 바로 차용증이었다. /셔터스톡 편집=조소혜 디자이너
서울 종로구에서 수십년간 전당포를 운영하던 A씨 부부. 아끼고 아낀 돈을 모아 경기도의 한 건물을 샀다. 경매 매물로 나온 덕에 시중 가격보다 싼 값에 장만했다. A씨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이 건물을 팔기로 했다. 큰 욕심 없이 안전하게 시세차익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인으로부터 그런 일을 매끄럽게 도와줄 사람을 한 명 소개받았다. 부동산에 대해 잘 알고 주변에 발이 넓은 '해결사'라고 했다. A씨는 해결사 B씨와 함께 부동산을 팔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B씨는 인맥을 과시하며 "부동산을 빨리 팔려면 관할 조직폭력배 두목에게 돈을 질러줘야 한다"고 했다. 이에 A씨는 현금 500만원을 쥐여줬고, 총 1억원이 넘는 사기극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B씨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검사에게 용돈을 쥐여 주어야 한다"라거나 "건물 감정 절차를 빨리 받으려면 급행료가 필요하다", "은행 직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 한다"는 다양한 핑계를 댔다.
그런 돈이 4500만원을 넘어가던 때, 불안했던 A씨는 B씨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건물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B씨는 흔쾌히 각서를 썼다. 이런 내용이었다.
"2014년 11월 19일까지 〇〇〇〇건 해결을 약속합니다. 차용금 4500만원. 〇〇〇〇건 해결해주는 조건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해를 넘겼다. 일은 하나도 진척된 게 없었지만, B씨가 받아 간 돈이 1억원이 훌쩍 넘어갔다. A씨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검찰에 고소했고, B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청에 소환된 B씨는 당당했다. 받은 돈은 '선물'이거나 '빌린 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입증할 증거를 꺼내 보였다. A씨에게 써줬던 4500만원 짜리 차용증이었다.
'차용증'이라는 이름에서 나와 있듯이 이 돈은 빌린 돈이고, 빌린 돈인데 어떻게 사기가 성립할 수 있냐는 주장을 펼쳤다. 빚을 진 것을 못 갚은 민사적 책임은 있지만, A씨를 속인 건 아니기 때문에 형사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실제 돈을 갚을 능력 있었거나 의사가 있는 상태에서 돈을 빌렸다면, 그 사람을 사기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
A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돈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작성했던 각서가, 순식간에 불리한 증거가 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차용증이라고 인정된다면, A씨는 1억원이 넘는 돈을 뜯겼음에도 4500만원만 피해액이 된다.
재판의 쟁점은 B씨가 A씨에게서 가져간 돈의 성격이 무엇이냐로 압축됐다. B씨 말대로 '빌린 돈'이라면 그를 사기죄로 처벌할 순 없었다.
서울중앙지법의 이준민 판사는 이 사건을 검토하면서 4500만원짜리 차용증에 대해 "차용증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차용증에 변제기 및 이자와 관련된 기재가 없고, 피고인(B씨)가 피해자(A씨)에게 어떠한 이자를 지급한 사실도 없다"며 "차용증의 기재만으로 피고인이 금원을 차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차용증은 피해자에게 부동산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피해자로부터 금원을 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라고 해석함이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각서의 제목이 차용증이라 돼 있지만, 문서의 형식적인 형태나 전후 맥락을 고려해볼 때 실질적인 성격은 차용증이 아니라고 보인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이준민 판사는 B씨에게 사기죄를 인정해 징역 1년 4개월형을 선고했다. 불구속 재판을 받던 B씨는 지난 7월 법정 구속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