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3)] 서울 상경 첫날, 경찰에게 뺨을 맞았다 "너 같은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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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3)] 서울 상경 첫날, 경찰에게 뺨을 맞았다 "너 같은 놈이…"

2020. 03. 18 15:05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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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도 안 된 이른 시간 경찰관은 갑자기 "너, 이 가방 어디서 훔쳤어? 말해!"라고 다그치며 뺨을 세차게 때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76년 1월 4일 저녁 늦은 시간 광주에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20세에 생전 처음 가는 서울이었다. 자정 무렵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 동대문에 도착하였다. 가로등 불빛에 눈발이 휘날리는데, 저 멀리 '숭인지문'이라고 기재된 현판이 보였다. 그 당시 12시가 되면 통행금지였기에 매우 급하게 고속버스에 동승했던 두세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탔다. 그들은 신촌 부근에서 내리면서 나를 향하여 "야! 택시비 내!"라고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이들의 택시비를 대신 내주어야 했다. 그들은 택시 기사에게 "아저씨! 이 꼬마 XX 여인숙에 데려다주시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택시는 이리저리 골목을 돌더니만 어느 건물 앞에 멈췄다.


크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2층에 있는 여인숙으로 올랐다. 계단을 중간쯤 오르니 카운터 방에서 두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출 소년이 오신다." 젊은 여자가 비웃듯 내뱉었다. 큰 가방 안에는 옷과 어머니가 해준 인절미와 볶은 콩 등이 들어 있었고, 절에서 공부했던 여러 권의 법서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촌놈 취급당하는 것이 창피했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방 있소?" "암! 방 있지! 저기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 젊은 여자는 복도에서 첫 번째 방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대꾸했다. 돈을 지불하고 방에 들어갔다.


복도 입구에 있는 방이라 자물쇠도 고장 난 상태였고, 문도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혹시 도둑이 들까 싶어 속옷 속에 들어있던 돈을 꺼냈다. 어머니가 속옷 안에 조그만 호주머니를 만들고 거기에다 돈을 담아 주었던 것이다. 종일 신다 벗어놓은 양말 속에 돈을 넣은 다음, 그 양말을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 곁에 두었다. 잠자는 사이에 도둑이 들어도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양말에 신경을 쓸 것 같지 않았다. 시골집 봉창보다 작은 창문을 통하여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완만한 산허리에 수백 채나 되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집들의 모습이 허름해 보였다. 골목도 위로 올라갈수록 비좁아 보였다. 골목길의 희미한 가로등 불이 서울의 밤을 지키고 있었다. 삭막하다는 느낌과 함께 두고 온 집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잠을 한숨 자고 나니 새벽이었다. 그냥 멍하니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누님이 있던 화곡동으로 가려고 여인숙을 나왔다. 몹시 추운 새벽이었다. 아침 5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다. 거리에 차량도 많지 않았다. 가방이 무척 무거웠다. 몇 발자국을 걷다가 쉬어야 했고, 가방을 오른손, 왼손으로 바꿔 가면서 들었다.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가다 보니 파출소가 보였다. 그 앞에 가죽 잠바에 장갑을 낀 경찰관 한 명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파출소 바로 앞에 다가섰더니, 그는 나에게 파출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다소 의아했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경찰관은 갑자기 "너, 이 가방 어디서 훔쳤어? 말해!"라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장갑을 낀 손바닥의 감촉이 무척 차갑고 둔탁했다. 새벽부터 뺨을 한 대 맞고 나니 정신이 얼얼했다. "내가 가방을 훔쳤다고요? 절에서 고시 공부하다가 어제 서울 올라와 누님한테 갈라고 여관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요"라고 하며 대들었다. 고시 붙으러 서울 올라온 첫날 새벽에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그 경찰관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가방의 지퍼를 열어젖혔다. 나 역시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이것저것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볶은 콩을 한 두 알 입에 넣고 툭 씹었다. 헌법,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과 같은 법서들이 있었고 법전도 나왔다. 가방 귀퉁이에 있던 기드온 성경책을 꺼내든 경찰관이 물었다. "절에 있었다는 놈이 왠 성경이냐?"고 비아냥거렸다. "고시 공부하려고 절에 있었고, 믿는 종교하고 절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아닙니까?" 나의 대꾸를 들은 그는 '그래 너 잘났다'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성경책을 자주 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며 내가 도둑인지 조회를 해보라고 했다. 경찰관이 내 이름을 물었다. "정형근입니다" 하였더니, 그는 오히려 기가 살아났다. 주민등록증의 이름과 다르다고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鄭享根'(정향근)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이름을 한자로 기재하는데, 형통할 형(亨)자라고 기재해야 하는데, 누릴 향(享)으로 잘못 쓰여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한 공무원이 '정향근'이라고 한문을 잘못 쓴 걸 그제야 발견했다. 주민증 받은 후에 한 번도 내 이름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름이 틀린 것을 확인한 경찰관은 더 나를 몰아붙였다. 얼마 후 나의 태도와 가방의 내용물을 본 경찰관은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너 같은 놈이 고시 붙으면, 아무나 판·검사하지!"


파출소에서 도둑으로 오해받아 뺨을 얻어맞는 것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화곡동에 있는 침식이 가능한 독서실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때는 대학 입시 철이라 본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밤에는 의자 서너 개를 일렬로 놓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잤다. 독서실 이용자들은 옷매무새와 말씨에서 촌티가 줄줄 흐르는 나를 주목했다. "무슨 공부를 하느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등을 물었다. 그때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 마치고 고시 공부를 한다고 하였다. 차마 중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대부분 "야! 장하다. 장해! 잘해 봐라"라고 웃었다. 누군가는 내가 검정고시 합격했다는 것도 의심된다면서, 고1 수학책을 들고 와서 인수분해 문제를 풀어보라고도 했다. 아무튼 나는 대학도 안 가고 고시 공부한다고 주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집에서 가져온 얼마간의 돈이 금방 떨어졌다. 그래서 석간신문 배달을 시작하였다. 신문 배달은 구독자의 집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착각하여 다른 집에 신문을 넣으면 구독자가 전화하여 호통을 쳤다. 배달도 잘해야 하지만, 중요한 건 구독료를 제때 받아와야 한다. 2층, 3층짜리 집 주인이 그달 구독료 낼 돈이 없다고 버티기도 했다. 구독료를 수금하지 못하면 월급에서 깎이는 손해를 보아야 했다. 동네 신문사 지부장은 구독자 확대가 어려우니까, 신문지를 정육점의 포장지로 팔아넘기고 수백 명 구독자를 확장하였다고 신문사에 허위 보고를 했다. 나에게 그 신문사의 화곡동 지부장을 해보라고 권유하여 공부하면서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영등포 어느 집에 가서 면접(?)도 보았다. 그렇지만 워낙 어리다고 거절당했다.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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