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에 일장기? SRT '간식 박스' 논란, 제작사보다 SRT 책임이 무거운 이유
거북선에 일장기? SRT '간식 박스' 논란, 제작사보다 SRT 책임이 무거운 이유
제작사는 계약 위반, SRT는 '최종 검수' 책임
'사용자 책임' 법리 따져보니

거북선에 일장기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진 SRT 간식 박스. /연합뉴스
수서발 고속철도(SRT) 특실 간식 상자에 그려진 거북선에 일장기 문양이 등장해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SRT 측이 공식 사과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최종 검수 책임이 있는 만큼 제작사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거세다. 법적으로 따져봐도 SRT가 책임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붉은 해 문양 깃발, 단순 실수로 보기엔 치명적
논란은 지난 9일 한 승객이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됐다. SRT 특실에서 제공된 'SRT를 타고 떠나는 낭만 여행 여수' 간식 상자였다. 여수의 상징인 거북선 삽화가 문제였다. 거북선 뒤편 깃발에 일본 국기를 연상시키는 붉은 해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일장기를 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순한 디자인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 상징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심각한 문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절대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SRT 측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란이 커지자 SRT 운영사 SR은 "문제가 된 간식 박스를 전량 회수해 폐기하고, 제작업체와의 계약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며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최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영사로서 SR의 책임이 더 무겁다는 비판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제작사, 형사처벌 어렵지만 '민사 책임'은 진다
그렇다면 간식 상자를 만든 제작사의 법적 책임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형사처벌은 쉽지 않아 보인다.
제작사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형법은 '국기모독죄(형법 제105조)'나 '외국국기모독죄(형법 제109조)'를 처벌하고 있지만, 이는 각각 대한민국이나 특정 외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어야 성립한다. 이번 사안처럼 역사적 상징물에 부적절한 문양을 사용한 행위 자체를 직접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하지만 민사적 책임은 이야기가 다르다. 제작사는 SR과의 계약에 따라 역사적 사실과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를 게을리한 것은 명백한 '주의의무 위반'으로, 계약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나아가 제작사의 행위는 불법행위에 해당할 수도 있다. 형사상 범죄가 되지 않더라도 고의나 과실로 타인의 법익을 침해했다면 민사상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대법원 2006다6713 판결). 제작사의 부주의한 디자인으로 인해 SR의 명예와 신용이 훼손되고, 국민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면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
최종 책임은 SRT에…'사용자 책임'과 '주의의무 위반'
문제는 최종 검수 책임이 있는 SRT다. 여론이 제작사보다 SRT에 더 큰 책임을 묻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도 SRT의 책임이 더 무겁게 다뤄질 수 있다.
가장 먼저 '사용자 책임(민법 제756조)'을 물을 수 있다. 이는 직원이 업무 중 타인에게 손해를 가했을 때 회사가 배상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SRT가 제작사를 고용해 간식 상자 제작을 맡겼으므로, 제작사의 과실은 곧 SRT의 과실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SRT는 승객들과 맺은 운송계약에 따라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역사적 상징을 왜곡한 간식 제공은 승객에게 불쾌감을 준 서비스로, 계약상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무엇보다 간식 상자 디자인을 최종 승인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과 국민 정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주의의무 위반' 책임이 가장 크다.
비록 SRT가 고의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없어 형사책임은 피할 가능성이 높지만, 민사 책임은 형사 책임과 별개다. 민사 책임은 행위에 대한 공적 제재가 아닌, 피해자에게 발생한 손해를 물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서울남부지법 2009가합15740 판결).
SRT는 공공성을 띤 기업으로서 주무 부처로부터 행정지도나 시정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행정지도는 법적 강제성이 없어(대법원 2006다18228 판결), 실질적인 책임 추궁으로 이어지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이번 사안은 제작사의 1차적 과실과 이를 제대로 거르지 못한 SRT의 최종 책임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법적으로는 양측의 과실 비율을 따져 책임을 분담하겠지만, 최종 서비스 제공자로서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힌 SRT가 더 무거운 사회적·법적 책임을 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