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32)]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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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32)]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2021. 04. 22 16:55 작성2021. 04. 22 17:16 수정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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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재판은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자보다는, 자백하고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자에게 아무래도 관대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형사소송의 목적은 실체적 진실발견과 신속한 재판을 들 수 있다. 형사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규명과 함께 신속한 석방이 새로운 과제로 주어진다. 구속의 고통을 참고 견디지 못하는 피고인에게 진실규명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단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될 길을 찾는다. 그 때문에 피고인 측에서 실체적 진실발견을 위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형사재판은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자보다는, 자백하고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자에게 아무래도 관대하다. 한순간의 육체적인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평생 지울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의 멍에를 떠안는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다. 관대한 처분의 은전(?)을 받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는 수사와 재판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아 간다. 바로 여기서 법리와 증거에 기초하여 순수하게 진실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변호인의 활동에 제약이 온다.


강간죄와 강간치상죄로 기소된 사건에서도 같은 문제가 생겼다. 피고인을 만나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처음 가보는 구치소인지라 길이 생소하였고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가로수의 푸르른 플라타너스 잎이 초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구치소 정문에 들어설 때 교도관이 핸드폰이 있으면 맡기고 들어가라고 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어느 구치소든 접견을 가노라면 전에 없던 사소한 제한이 가해진다. 어느 곳은 핸드폰뿐만 아니라 녹음기나 카메라까지 맡기고 들어가라고 한다. 변호인을 무슨 첩보원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접견실 벽에는 접견 시 주의사항이라는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무지하게 강조하려는 듯 문장마다 빨갛고 파란 색으로 밑줄을 그어놓고 있다. 이것도 하지 마시고 저것도 하지 마라는 것으로 온통 금지하는 내용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금지규범의 모습을 거기서도 보게 된다. 언제쯤에 "…해도 괜찮습니다"라는 허용의 문화, 관용의 문화가 자리할까 궁금증도 스친다. 아무튼 접견 시 주의사항이라는 모든 문장의 끝에는 "…하는 행위 등"이라고 되어 있다. 무언가 문제가 되었을 때 목청을 높일 수 있는 근거를 "등" 자 안에 숨겨둔 것이다. 갈수록 삭막해져 가는 분위기를 절감하여 가방에 있는 핸드폰을 건네주며 정문을 통과한다.


정문에 들어가서 접견실 방향을 바라보는 순간 "형님처럼 가르치고 동생처럼 배우자"라는 구호를 기재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에 자주 다녔던 구치소에는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하루를 희망 속에 살아가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피고인은 40대 중반으로 홀로 지내온 분이었다. 중학교 다니는 아들 한 명과 살아가던 중 사건에 연루되었다. 피고인은 어렵사리 집을 마련하고 오붓하게 살고 있던 차에 아내가 암에 걸려 사별을 하게 되자 살던 집을 세놓고 셋집을 얻어 나왔다. 아내와의 추억이 스며있는 집에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이 사건 직전에는 제철 회사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여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범행 장소는 피고인이 살던 집 안방이었고, 피해자는 집주인이었다.


공소장에는 피고인이 정오 무렵 안방에서 누워 있는 피해자를 한 번 강간하였으며, 며칠 후에 또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그 바람에 약 3주간의 상해를 입혔다고 되어 있었다. 피고인은 사건 발생 1개월 전 손가락 절단 사고에 대한 보상금으로 1000만원을 수령하였다. 그는 주인에게 이사를 가겠다며 방을 빼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던 차에 피고인은 야간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아주머니를 마당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피고인은 다시 이사를 가겠으니 방이 빨리 빠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당시 집에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고인이 방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워 자려고 할 때, 아주머니가 유자차를 가지고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왔다. 속옷 차림인 피고인은 엉거주춤 일어나 이불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아주머니는 "지금 방이 나가지 않으니 1년만 더 살면 안 되겠냐"며 피고인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에 손을 얹으며 다가와 피고인을 껴안더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 방안에서 맞서게 되는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 어려웠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피고인은 그 후에도 한 달여 사이에 걸쳐 그 여자와 여관에서 두 번, 피고인의 방에서 두 번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하였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은밀한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이제는 공개리에 그 일과 전혀 상관없었던 제3자들의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피고인은 서로 눈이 맞아 벌인 일이라고 하고, 피해자는 당한 일이라 한다. 사람은 입이 하나라서 자기 입장만 말하게 되고 귀는 두 개라서 양 당사자의 말을 들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내 의뢰인이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믿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이 진실한지를 증거에 비춰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경청을 한다.


수사기록을 꼼꼼히 읽어 나갔다. 피해자가 진술한 기록을 보니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변호인으로서는 한번 무죄를 다투어 볼 만한 사건이었다. 구치소에서 두 번째 접견을 하였을 때도 피고인은 비교적 담담했다. 고생스럽지 않느냐는 인사에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요" 하며 애써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려움을 잘 참아 넘기는 그에게 내심 고맙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는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구속으로 그 아들은 전에 살던 집에서는 살지 못하고 친척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형편이었다. 피고인은 자신의 고생은 상관없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탈선이라도 할까 봐 염려스럽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하든 빨리 석방될 수 있게만 해달라고하였다. 자신의 인생은 구겨지고 휘말렸지만, 어린 자식만큼은 바르게 키워보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는 경찰에서부터 검찰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도 신속한 석방의 이념이 앞세워지는구나! 하루가 급하다고 성화하는 사람 앞에서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숭고한 이념이 설 곳이 어딘지 둘러본다. 피고인의 심경의 변화를 듣는 순간 기록에 신경을 쓰는 프로 운동선수 마냥 "이런 사건에서 무죄를 받지 못하면 어떤 사건에서 받아보겠는가"하는 서운함이 앞선다. 그러나 단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사이에 지방을 오가며 재판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뒤따른다.


피고인의 명시적인 요청이 아니더라도 강간치상죄는 5년 이상 징역이라는 높은 법정형과 양육해야 할 아들 문제도 있어, 억울하다는 피고인의 말에만 집착할 수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피고인의 절박한 현실에 부응하는 변론 방향을 잡아본다. 어쩐지 가볍게 타협해 버린 듯한 느낌으로 기분이 씁쓸하다. 합리화라도 할 요량으로 1%가 될까 말까 한 낮은 무죄율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그리고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질문을 할 반대신문 사항을 타이핑하는 손길이 바쁘다. 몇 주 후 법정에서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한 신문에 피고인의 답변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그러자 재판장이 왜 수사기관에서는 범죄사실을 부인하였느냐고 자꾸 묻는다. "저는 서로 좋아서 한 거로 생각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여자는 저와 달랐던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피고인은 연신 변호인석에 있는 나를 향하여 눈길을 껌뻑거린다.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한다고 한 후 나는 변호인석에서 일어나 피고인의 눈을 보면서 자세하게 준비해 간 반대신문사항을 차분하게 물었다. 분량이 많아서 빨리 읽어 나가도 줄지 않는 느낌이라서, 괜스레 다음 재판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변호사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합의를 해주지 않아서 고소인을 위하여 300만원을 공탁한 후 그 자료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두툼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다투지 않고 인정한 이유 등에 관한 변론요지서를 제출함으로 재판은 끝나고 판결을 선고할 날짜가 정해졌다. 피고인의 아들이 작성해 온 탄원서도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저는 〇〇〇씨의 아들 △△△이라 합니다.


XX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께서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엄마 몫까지 하시며 커다란 불편 없이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친척 어른께서는 자세한 말씀도 안 해주시고, 그저 모함에 빠져 구치소에 계신다고만 합니다.


재판장님!

저의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쳐 주셨고, 엄마가 없지만 명랑하고 밝게 살자고 하셨습니다. 제겐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그곳에 계셔야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카네이션도 달아 드릴 부모님이 안 계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쓸쓸한 날이었습니다. 슬프고 답답한 요즈음입니다.

고모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날이 그립습니다. 저의 가정을 생각해 주셔서 저의 아버지를 선처해 주세요. 제겐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웃음과 목소리 그리고 아버지께서 해 주시는 김치찌개 그 모든 것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재판장님!

저의 아버지를 전 너무나 사랑합니다.


보름 후 판결 선고일에 피고인은 석방되었다. 그는 나를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시종 밝은 표정의 그를 보면서, 아버지와 함께 다시 보금자리를 이루어 갈 아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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