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해묵은 오해, 75살 할아버지가 이웃집에 불 지르게 만들었다
[단독] 해묵은 오해, 75살 할아버지가 이웃집에 불 지르게 만들었다
'산동네' 이웃 사이 발생한 방화 사건, 이유는 '근거 없는 소문'
피해자 할머니 "소문낸 적 없다" vs. 불지른 할아버지 "소문 냈다"⋯정반대 증언
재판부가 '방화 미수'는 인정했지만 '살인 미수'는 인정하지 않은 배경은?
![[단독] 해묵은 오해, 75살 할아버지가 이웃집에 불 지르게 만들었다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2019-11-01T18.18.14.453_587.jpg?q=80&s=832x832)
자신의 집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다고 생각한 75살 할아버지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올해로 76세인 주씨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 이웃집 할아버지와 불륜 관계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집 할머니는 주씨와 마주칠 때마다 "내 남편이랑 몇 번 했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해댔다. 주씨 할머니는 "늘그막에 상간녀가 됐다"고 억울해했다.
이웃집 할아버지네 이야기는 달랐다. 아내로부터 '불륜남'이라 의심받은 신모(75) 할아버지는 "주씨가 '헛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아내가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씨 할머니가 먼저 "저 집 여자는 의부증(疑夫症)이 심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가해자 신씨 할아버지 주장이다.
지난 30일 서울북부지방법원 601호 형사중법정.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나온 진술이다. 소문을 둘러싸고 양측의 입장이 정반대로 갈라졌다. 피고인석에는 신씨 할아버지가 앉았다. 혐의는 살인 미수와 현주건조물방화 미수. 사람이 있는 건물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일 뻔했다는 혐의였다.
사건은 지난 6월 5일 오후 2시쯤 벌어졌다. 서로 "우리 집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두 집의 갈등이 폭발했다. 신씨 할아버지가 주씨 할머니네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다행히 불은 금방 꺼졌고 결과적으로 집 안에 있던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지만, 불을 지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범죄를 어디까지 처벌해야 하는가'로 재판의 쟁점이 모아졌다.
가장 먼저 증인석에 앉은 건 피해자 할머니 주씨였다.
주씨는 사건이 발생한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절에 다녀왔더니 갑자기 할아버지(피고인 신씨)가 우리 집에서 쓱 나왔다. 그걸 보고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왜 왔냐'고 물었더니 신씨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방에 들어왔는데 몇 분 뒤 뭔가가 '훌훌훌' 타는 소리가 나더라."
불이 붙은 지점은 방문 밖 바로 옆, 연탄 더미였다. 불은 다행히 금방 꺼졌다. 주씨가 "이게 왜 난리야, 난리야"라고 소리치자 이웃들이 몰려들어 불을 껐다. 연탄 더미 위에 놓여있던 나무판자가 조금 그슬린 정도였다.
오히려 이날 다친 사람은 불을 낸 신씨였다. 집에 있던 주씨 아들이 도망가던 신씨를 붙잡았다. 폭행이 시작됐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신씨는 간이 9cm 정도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주씨 아들은 폭행 이유로 "신씨 할아버지가 도망가며 '다 죽이겠다 '고 말해서 그랬다"고 주장했다.
신씨 변호인 측은 '주씨가 먼저 잘못한 게 있다'는 쪽으로 질문을 집중했다. 주씨가 신씨 아내를 겨냥해 '의부증 소문'을 낸 것이 이번 일의 시작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의부증이라고 욕한 적 없어요?" "기억이 없다고요?" "왜 기억이 안 나요?" "뭔가 껄끄러운 일은 없었어요?" "진짜 한 마디도?" "한 마디도 없었다고요?"
1분 사이에 이 모든 질문을 퍼부었지만 주씨는 "모르겠어요"하거나 "몰라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런 뒤 "이제 집에 가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재판장은 허락했다.
이어 피고인 신씨 할아버지가 나왔다. 얼굴 곳곳에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등산용 운동화는 흙이 묻어있었다. 신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유로 헤드셋을 썼다.
신씨는 범행의 이유를 "감정이 너무 쌓이고, 쌓여서 괴로워했다"며 "이렇게 살아서 뭐 하겠나 싶었다"고 했다. 이어 "미리 시너 1L짜리 1통을 준비한 건 맞지만, 사람을 해치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공판 검사가 "미리 준비를 다 해놓고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자신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치려고 했으면 낮이 아니라 밤에 불을 질렀을 것"이라고 답했다.
신씨 할아버지는 범행 전후 상황에 대해 주씨와 전혀 다르게 기억했다.
① 범행 직전 주씨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냐"는 다툼이 있었다는 점 ② 불을 지르고 난 뒤 "불 질렀으니까 나오라"고 말한 점 ③ 범행 직후 "다 죽이겠다"고 말한 사실은 없다는 점 등 세 가지를 주장했다.
주씨 할머니가 앞서 ① 다툼은 없었고 ②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불이 '훌훌훌 ' 나는 소리를 듣고 나왔으며 ③ 신씨가 도망가며 '다 죽이겠다'고 말한 점과는 모두 정반대인 진술이었다.

당황한 재판부가 나섰다.
그러나 "왜 진술이 다르냐"는 질문에 신씨는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고 답했다. 이후에도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앞서 신씨는 경찰 조사에서 ③ 범행 직후 '다 죽이겠다'고 말한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말을 바꿨다.
여기서 신씨는 "조사 당시 주씨 아들한테 폭행을 당해 몸이 너무 안 좋았다"며 "경찰이 유도하는 느낌이 들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경찰 조사는 사건 발생 직후와 17일 뒤인 6월 22일. 두 번 이루어졌다. 심한 폭행을 당한 상태에서 두 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대목에서 법정의 분위기는 '신씨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공판 검사를 맡은 이재연 검사는 최종의견 진술에서 분위기를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이 검사는 "신씨는 사람이 뻔히 있는 집에 불을 저질렀다"며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해당 집은 밀집된 산동네에 위치해 자칫 매우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화재 장소가 방문 바로 옆에 있던 연탄 더미였기 때문에 이 문이 불에 탔다면 살인에 이를 수 있었다"며 "살인미수가 맞다"고 밝혔다.
신씨가 진술을 뒤집은 것에 대해서도 이 검사는 "신씨가 자신에게 유리한 게 뭔지 생각을 하면서 부정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검사는 마지막으로 "신씨가 경찰 조사에서 '죽이겠다'고 말했다고 스스로 밝힌 점, 범행도구인 시너와 라이터를 미리 준비해간 점 등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진술을 마쳤다.
모든 사실을 종합한 뒤 최종적으로 "징역 4년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국선전담 변호인은 "불을 저지른 행위는 인정한다"며 최종진술을 시작했다.
다만 "살인의 고의는 없었다"며 "범행 시간이 낮이었고, 피해자 주씨와 대화를 시도한 점, 도주 전에 주씨에 '불을 질렀다'고 알린 점, 주씨와 관계가 평범한 점, 범행 동기가 없고 주씨의 퇴로도 차단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서 '살인의 고의'를 두고 다투는 이유가 있다. 살인죄가 미수로 인정되기 위해선 '고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씨를 죽이겠다'는 적극적 고의, 또는 '주씨가 죽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검사는 "있다"고 했고, 변호인은 "없다"고 맞섰다.
변호인 측은 이어서 "불을 저지른 점은 신씨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해 가정 파탄 위기에 처한 우발적 범행임을 알아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전과가 없고, 주씨의 아들에게 붙잡혀 폭행을 당한 이유로 건강 상태가 안 좋은 점, 고령인 점 등을 참작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려달라"고 했다.
피고인은 최종진술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며 말을 마쳤다.
오후 4시 30분. 서울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마성영 부장판사)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배심원 9명과 평의실로 자리를 옮겨 논의를 시작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오후 7시 30분. 선고 결과가 나왔다. 재판장은 신씨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앉아서 들으세요"라고 말했다.
신씨는 선고가 내려지는 동안 한 손으로 헤드셋을 꽉 움켜쥐고 들었다. 또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있었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다.
재판부는 신씨에 "살인미수는 무죄, 방화미수는 유죄로 선고한다"며 "징역 9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의 행위는 갈등 관계 속에서 분노를 표출하려는 의사였다"라며 "이를 넘어 피해자를 불에 타 죽게 할 정도로 보기에는 미흡하다"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① 범행 당시 다툼 여부 에 대해서는 "갈등이 있었다"며 폭넓게 인정했다.
또 진술이 엇갈렸던 ② 신씨가 범행 직후 문을 두드리는 등 불이 난 사실을 알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관되게 수사기관에서 문을 두들겼다고 진술했고, 피해자 주씨가 언급한 '훌훌훌' 타는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톡톡톡' 소리는 비슷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③ 신씨가 '다 죽이겠다'고 말한 점 역시 "살해 의사라기보다는 분노의 감정적 표출"이라며 "수사기관에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한 거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인이 초범이고 고령인 데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점,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범행으로 인한 실질적인 피해가 크지 않으며 피해자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유리하게 참작했다"고 밝혔다.
배심원 전원도 만장일치로 재판부와 판단을 같이 했다.
집행유예를 받은 신씨는 그의 아내, 사위와 함께 늦은 저녁 8시. 법원 청사를 걸어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