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5모작 이야기-겨울채비
인생 2.5모작 이야기-겨울채비

어느새 11월 중순,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한다. 해당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느새 11월 중순, 겨울채비를 위해 울긋불긋한 단풍과 황금물결의 은행나무가 옷을 한창 벗고 있는 늦가을입니다. 인생2.5모작 열한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출근길에 쌓이는 가로수 낙엽을 밟으면서,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낙엽이 떨어질 때 보면 치워도 또 치워도 다시 쌓여서, 매일 아침 청소부들을 지치게 합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는데, 나무들은 겨울나기를 위해서 거꾸로 자신의 옷을 벗고, 몸집을 줄여서 추위를 견뎌 냅니다.
나무의 생존방식이 사람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나무는 나무대로 수백만 년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스스로 알맞게 터득한 생존의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지혜란 다른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의식적인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에 대한 새로운 추구를 멈추고, 즉 ‘지금의 나’를 지키려는 어떤 미련이나 여한을 내려놓고, 죽은 자의 입장이 미리 되어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음력 10월에 조상님께 시제(時祭) 올리는 풍습을 갖고 있고,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도 11월에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성월 행사를 엽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의 배경과 원인이 된 핼러윈 축제행사도 그런 서양 종교문화에서 유래되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11월은 죽은 자의 지혜를 통해서 삶의 본질을 깨닫기 알맞은 계절입니다.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문득 젊은 검사 시절 처리했던 대형 교통사고가 생각났습니다. 1985년 1월초 한 겨울이었습니다. 충북 영동지청에 근무할 적에 일어난 버스 추락사고입니다. 경찰에서 사건발생보고가 올라오자마자 현장에 가보니, 시외버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다리 난간에 부딪혀 강물에 빠져버린 대형 교통사고였습니다. 승객 중 딱 한명만 헤엄쳐서 살아남았고, 운전사 포함 승객 38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평소 사건이 적어서 편하게 근무하다가 떠난다는 시골 지청에 부임하자마자, 난데없이 큰일이 터진 셈이었습니다. 전국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온 국민의 관심이 영동으로 쏠렸습니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버스회사 사장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구속 건의(품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기록검토를 마치고, 유일한 생존자가 입원한 대전 병원에 가서 참고인 진술을 청취하고, 지청장님께 불구속 수사지휘를 보고드리고,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충북도경 수사과장(총경급)이 영동지청까지 내려와 구속영장을 청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 도경 수사과장은 제가 서울남부지청에서 교통사고 전담검사로 일하던 시절, 구로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재직하다가 승진해서 내려온 분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민심을 수습해야 하는데, 사고 운전자가 사망했으니, 사고업체 대표자라도 구속해서 검찰 송치를 하겠다는 절박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운전자 아닌 사업주에 대한 업무상 과실 인정이 어렵고, 인과관계 입증도 곤란해서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으로 공소유지가 불가능하니, 그 죄명은 불구속 송치하고, 회사 내규상 과로운전 금지위반 등 보강 수사해서 처벌하면 어떻겠냐고 절충안을 내어 설득했습니다.
만일 당시 제가 민심이나 여론동향을 조금만 더 민감하게 생각했더라면, 사업주의 구속 문제로 더 많이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법리상 너무 당연한 판단이라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젊은 검사의 교과서 같은 지휘에 그대로 승복해준 도경 간부의 겸손한 자세에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후 저는 여러 검찰청을 전전하다가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 지청은 영월, 정선, 평창, 태백의 탄광지대를 관할하면서, 주요 탄광사고를 처리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곳입니다. 부임 1주일 만에 정선의 탄광 폭발사고로 광부 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보통의 사고보다 피해 결과가 훨씬 중해서, 처리기준에 따라 사업소장까지 과실책임을 물어서 구속기소를 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탄광사고는 연례적으로 일어나는 대형사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현대 산업사회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허용된 위험’의 하나로 받아들여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업소장까지 구속된 것은 몇 년 동안 없던 일이라고, 다들 놀랐습니다.
그 후 지역 여론을 들어보니 사업소장에 대한 평판이 좋고, 한때 호황이던 석탄 산업이 사양산업화 되어 몇 개 남지 않은 탄광의 추가 폐광으로 이어지고, 지역 경기 위축으로 인구 감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민심을 전해 듣고서, 저도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춘천지검 검사장님을 모시고 태백시 소재 탄광의 지하 300미터 갱도에 내려가서 막장까지 들어가 보았습니다. VIP코스라 하는데도 시커먼 막장에는 화끈거리는 열기로 가득했고, 호흡이 불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광부들의 고달픈 삶과 힘겨운 작업환경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탄광지역은 관내에 300개 넘던 중소형 탄광이 대부분 폐업하고, 대형 광업소 3개만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도, 호황시절부터 관행처럼 굳어진 부정부패는 여전하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실제로 태백시 공무원 비리 수사과정에서 도시계획상 상하수도 설치공사를 계획대로 시행하지 않고, 서류 조작 후 국가 예산을 횡령한 공무원 여러 명을 적발해서 구속 기소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전국 순환근무로 지역사회에 유착되지 않은 검사의 존재야말로, 토착비리에 물들기 쉬운 지방 풍토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형 참사사건이나 중요 경제사범의 경우, 초동수사 단계부터 수사지휘권을 갖춘 검찰이 경찰 및 관계기관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서 수사방향을 바로잡고, 법률적용을 치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업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가애도기간을 마칠 무렵, 경북 봉화 광산매몰사고로 갱도에 갇힌 광부 2명이 열흘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천만다행이고,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사고원인 규명과 책임소재를 가리는 문제는 수사기관의 막중한 임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몰 광부가 생존 귀환했다고 해서, 만일 검·경의 수사과정이 소홀히 진행된다면, 신상필벌을 토대로 하는 사회정의를 지키기 어렵고, 향후 사고의 예방대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정부시절, 국회가 검찰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검수완박 입법을 강행한 것은 졸속 입법이고, 벌써부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걱정이 듭니다.
사실 예전 일선검찰에서 일할 때는, 대형 참사사고가 발생하면 일선 경찰에서 경찰 상부와 검찰에 동시에 사건발생보고가 올라가고, 당직검사가 즉시 현장 출동해서 경찰과 함께 초동 상황을 파악해서, 양쪽으로 보고가 올라가는 시스템이었고, 그런 크로스 체크 과정을 통해서 국가 형벌권 행사의 엄정함과 적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종래 효율적으로 운영되던 시스템을 급격하게 바꾸려면, 대의명분이 뚜렷하고 치밀한 검토가 뒷받침되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며칠간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 동안에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콩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3년 동안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 행복을 주던 귀여운 말티즈 강아지였습니다. 너무 고통을 호소해서 아내가 병원에 가서 수액주사를 맞혀도 며칠 지나면 마찬가지고, 마지막에 밤새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는 우리 능력의 한계가 안타까웠습니다. 늘 다니던 동물병원 수의사와 상의 끝에 안락사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한 이후 문득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정해서 동네 동물병원에서 짱이를 분양해 왔고, 그 짱이가 몇 해 뒤 우리 집에서 콩이를 낳아, 세상이라곤 오직 우리 집만 전부로 알고 함께 살아온 짱콩이 모자였습니다. 15년 넘게 짱이·콩이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을 돌이켜보면, 번거로움조차도 즐거움을 주던, 꿈과 같이 흘러간 시간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누군가를 책임지게 될 것이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면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콩이와의 작별은 적어도 우리 부부에겐 망설임과 내리기 힘든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없는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뉴스를 듣고 보면서도, 그저 강 건너 불처럼 생각해 왔지만, 콩이를 떠나보내면서 불현듯 삶과 죽음의 허상과 실상을 깨닫게 하는, 언젠가 ‘지금의 나’에게도 닥칠,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문득 옛날 중국 6세기경 삼조 승찬(三祖 僧璨)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멈추면 다시 큰 움직임이 일어난다(止更彌動/지갱미동). 그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라”하는 구절이 있더군요. 그렇듯이 저를 포함하여 누구나 온전한 ’제정신‘, 즉 ‘더 큰 사랑’이 깨어나려면, 무엇보다 육신을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나‘라고 하는 태생적 한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누구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규정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모든 ‘향함’과 ’지향‘을 멈추게 될 때, 바로 그때, 비로소 ’더 큰 사랑‘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짱콩이를 모두 보내고, 멈춤의 시간을 거쳐 우리 집이 다시 썰렁해졌습니다. 슬프고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쉬어가도 괜찮아’ 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모처럼 삶의 여유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부부에게 짱콩이 모자가 주고 간 축복의 선물입니다.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특별한 장수 비결은 없지만, 정직이 최선의 소송전략이라는 마음가짐만큼은 분명합니다. 매일 아침, 바를 정(正)자를 쓰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지난달 칼럼에서, 제가 5년째 맡고 있는 소송사건 하나를 소개해 드렸는데, 혹시 읽어보셨는지요? 이 사건을 소개한 이유는 그 사건의 원고가 한국 법집행(law enforcement)의 맹점으로 인해서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연은 어느 공익재단을 상대로 임금 및 퇴직금 소송에 승소해서 판결확정 후에도, 피고 재단은 법인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자진 변제를 거부해서, 채무명의를 확보하고도 민사집행을 못하는,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피고 재단의 설립자는 엄청난 개인재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임금체불 사건에서 법인격부인론의 적용에 소극적이고, 이사회 구성원에 대한 개인적 불법행위는 거의 인정하지 않는, 우리 법원의 독특한 판결경향으로 인해, 법집행의 사각지대가 몇 해 동안 방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고는 2007년 한국에 정착한 이래 15년 넘게 국내 여러 대학에서 미국법과 미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법학자입니다. 그분은 한국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지역사회에서 합창단 활동이나 트럼펫 연주를 즐기며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나 북한 아동에 대한 지원사업 등 국제 인도적 활동에도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물론 피고법인도 알고 보면 무언가 속사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임금체불은 근로기준법상 사업자의 기본의무에 위반하는 범죄행위이며, 특히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헌법적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피고법인의 이사회는 국내 최상류층이자 사회 지도적 인물로 채워져 있고, 세상에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만일 채무명의 원리금 변제가 단시일 내 없다면, 더 이상 피고법인의 태도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부득이 법인 대표자 개인을 상대로 새로운 소송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이제는 저 혼자 속 썩이지 않고, 주위에 널리 알려서 도움을 받으며 진행하고 싶습니다. 또다시 1,2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축적된 증거자료를 토대로 사회상규와 선량한 풍속을 지키기 위한 공익소송으로 진행하여, 우리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는 데 일조하려고 합니다.
여러해 동안 엄청난 시간 투입에도 불구하고, 실제 변론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답보상태를 보면서, 어떤 분은 제가 어려운 사무실 운영을 도외시하고, 지쳐 버릴까 봐 걱정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쳐가는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힘이 들어도 꾸준히 상식과 순리를 따라가면 결국은 일이 풀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송은 저 자신의 변론철학을 지키기 위한 ‘겨울 채비’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