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시간은 쌓이는 것
[로드무비] 시간은 쌓이는 것
[law de movie]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 1997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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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의 거소이던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옥상에서는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조각은 1735년에 만들어진 파올로 베나글리아의 작품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나팔을 부는 천사'라는 해설도 있다. /이범준 작가 제공
이탈리아 로마 트레비 분수에서 500미터 걸어 올라가면 헌법재판소가 나온다. 재판소 건물은 1735년에 지어져 교황청재판소로 쓰였다. 그러다 이탈리아 왕국(1861~1946) 시절에 왕족 거처로 쓰이다가, 이탈리아 공화국이 되면서 헌법재판소가 사용하고 있다. 2018년 이곳을 찾아 다리아 데 프레티스(Daria de Pretis) 재판관을 만났다. 데 프레티스 재판관 집무실에는 마르게리타 왕비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세기 화가 굴리엘모 데 상크티스(Guglielmo de Sanctis) 작품이다. 이 집무실을 마르게리타 왕비가 썼을 것이라고 한다. 천장에도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린 18세기 작품이 있었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헌재)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은 전통이었다.
법학 교수 출신인 다리아 데 프레티스 재판관은 2014년 대통령 지명으로 9년 임기 재판관이 됐다. 이탈리아 헌재 재판관은 모두 15명이다. 이탈리아 재판관은 의회, 대통령, 법원이 5명씩 뽑는다. 우리나라는 대법원장 개인이 3명을 낙점하지만, 이탈리아는 사법부가 기구를 구성해 선출하는 점이 다르다.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헌재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대사를 거쳐 왔다. 나라가 나뉘어 있었고, 전쟁을 치렀으며, 독재를 거치면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겪었다. 독재를 극복하면서 세워진 헌재가 기존 대법원과 오랫동안 갈등해온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헌법기구 베니스위원회 집행위원인 강일원 전 재판관이 내게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취재를 추천한 이유도 비슷했다.
로마에 머무르면서 어디를 달려도 오래된 건축물이 있었다. 콜로세움, 판테온, 산탄젤로성을 지나면서 이 도시에 여러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마라는 공간은 로마라는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일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관이 떠올랐다. 달리는 나 자신이 조금 어색하게 여겨진 도시가 로마였는데, 로마의 축적된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탈리아에도 좋은 마라토너가 많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마라톤 우승자 젤린도 보르딘이 이탈리아 사람이다. 보르딘은 올림픽과 보스턴마라톤을 모두 우승한 유일한 남자 마라토너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한국 법학계에 미지의 세계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나온 이탈리아 헌법 관련 논문이 10편도 안 된다. 이탈리아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영어권도 비슷하다. 이탈리아는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대륙법계 국가이면서도 로마법의 전통이 남아 있어 미묘하게 다르다. 현대 이탈리아법은 독일과 프랑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로마법을 이어 근대법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탈리아에 역수입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김동훈 헌법재판소 연구관은 "이탈리아 법학에서는 역사가 이어진다. 논리와 합리로 설명되지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라고 했다. 이성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국 같은 나라와는 다르다고 했다.
미국 연방대법원 결정에는 소수의견이 있고, 더러 소수의견이 더 주목받기도 한다. 이런 점은 한국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헌법재판소들은 소수의견을 내지 않는다. 다리아 데 프레티스 재판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저로서는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헌재에 소수의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폭넓은 해결책을 강구하고 그렇게 해서 나온 헌재의 다수의견을 존중합니다. (재판관들) 의견 차이가 있어도 특정 사건 토론과정에서 있는 일시적인 충돌입니다. 반대의견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헌재에서도 있었지만 결국 지금과 같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외부에는 일시적인 의견 충돌도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결정했습니다." 독일도 소수의견을 쓰지 않다가 나중에 쓰게 됐다.

유럽의 법에 대한 태도, 즉 헌법재판 스타일이 미국 연방대법원과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미국법은 판례법(common law)이고 이탈리아법은 로마법에 영향을 받은 성문법(civil law)입니다.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최근 통합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부분은 (미국식) 합리성 심사가 확산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헌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헌재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기준입니다." 합리성 심사는 입법부가 멋대로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면 합헌이라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개발해 써왔다. 모든 법률을 이렇게 심사하지는 않고, 합리성 심사를 하는 분야가 따로 있다. 현대국가 운영에는 깊은 전문성이 필요하고 가능하면 의회와 정부에 재량을 줘야 한다는 최신 흐름을 이탈리아 헌재도 인정하고 있었다.
세계 주요 국가의 헌법 제1조를 기획 기사로 소개한 적이 있다. 독자들이 좋아한 조항 가운데 이탈리아 헌법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이다. 이 조항의 의미를 물었다. "(1947년에 제헌의회가) 헌법 제1조를 만들면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노동에 기초한'과 '노동자에 기초한'을 두고 토론이 있었습니다. 더 폭넓게 더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노동에 기초한'으로 결정됐습니다. 모든 사람의 사회적 가치와 위치는 (노동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가문이나 혈통에 의한 사회적 지위를 철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헌법 제1조의 의미이고 전체 헌법을 해석하는 기반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절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해 이탈리아 군인 수십만 명을 독일 본토에 데려가 강제로 노역시켰다. 두 나라는 1961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경제·민사 관계를 청산키로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나치독일의 불법행위는 청산조약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이탈리아가 주장했다. 이탈리아군 포로에게 강제로 노역시킨 행위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법원은 과거 전쟁포로가 낸 소송에서 배상을 명령했다. 이에 독일은 국제사법재판소(ICJ)로 분쟁을 가져갔고 결국 이겼다. 이 이탈리아 사례가 2018년 대법원의 일제의 노동자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사건 판결문에 등장한다. 대법관들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사건을 인용하고 있다. 한국과 다르다는 지적도, 같다는 설명도 있다.
다리아 데 프레티스 재판관에게 이 사건의 과정과 결론을 물었다. "사실은 굉장히 복잡한 판결입니다. ICJ의 판결을 이탈리아 헌재가 다시 부정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ICJ는 이탈리아 전쟁포로가 독일에 배상을 요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주권면제협정이 이유입니다. 이에 이탈리아 법률제도는 ICJ 판결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이탈리아 헌재가 결정했고요. 저는 당시 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이탈리아 헌법 제11조 위반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지, ICJ와 이탈리아 헌재 결정이 모두 존재하는 상태인지 다시 물었다.
"ICJ 판결은 2012년에 있었고 이탈리아 헌재 결정은 2014년에 나왔습니다. ICJ 판결은 이탈리아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된 이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ICJ 판결은 이탈리아에 적용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국제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판사가 ICJ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이유는 (이탈리아 헌재에서 위헌으로 결정된 판결이므로) 이를 따를 경우 이탈리아 판사는 관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헌재가 '이탈리아 법관은 (ICJ 결정에 영향을 받아) 기존 관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라고 결정한 셈입니다." 요약하면 이탈리아는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ICJ에서 뒤집혔다. 그러자 이탈리아 헌재가 ICJ 판결을 위헌으로 만들었는데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법원의 판단 방향을 제한하는 한정위헌이나 한정합헌 결정을 한국 대법원은 따르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헌재와 대법원에도 비슷한 갈등이 있었다. 이 문제가 결국 어떻게 해결됐는지 물었다. "헌재와 대법원이 따로 있는 모든 국가가 겪는 문제입니다. 이탈리아도 이런 문제를 겪어왔습니다. 아직도 갈등이 남아있지만, 해결 방법을 찾은 상태입니다. 우선 법률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권은 대법원에 있습니다. 대법원에 마지막 결정권이 있지만 이 해석을 헌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헌재에 위헌법률심판권이 있습니다. 대법원 해석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검토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헌재와 대법원의 갈등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미하게 갈등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이 특정 해석을 고집하면, 헌재는 그런 해석은 위헌이라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쉽게 해결이 되는지 궁금했다. 오히려 한국처럼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자제하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말씀드렸듯이 대법원과의 갈등이 거의 없어서 한정위헌 결정을 자제하지 않습니다. 대법원이 다양한 해석(을 하라는 헌재의 결정)을 인정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헌재는 대법원 해석이 사건이 되어서 와야만 위헌 여부를 검토합니다. 하지만 대법원의 해석이 문제가 되어 헌재에 오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헌재에 판사 출신 재판관이 여럿 있습니다. 이들을 매개로 헌재와 대법원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사법부가 재판관을 선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있으니 오히려 우리나라는 재판관 대부분이 판사 출신인데 상황이 왜 이렇게 다른지 고민됐다. 제도를 뛰어넘는 전통과 분위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점령한 이탈리아가 배경이다. 유태인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연기)는 어린 아들과 수용소로 끌려간다. 귀도는 아들에게 이곳은 게임을 하는 캠프이며, 1000점을 얻으면 탱크를 얻는다고 한다. 감시원을 피해 숨어있으면 점수를 얻지만, 엄마를 보고 싶어 하거나 배고프다고 하면 점수를 잃는다고 한다. 연합군인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하기 전날 귀도는 떠나는 독일군에게 총살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게임의 규칙을 지켜 결국 살아남는다. 그리고 정말로 탱크를 선물로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