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Law, Talk!] 악인(惡人)의 엄벌과 성찰적 분노…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Law, Talk!] 악인(惡人)의 엄벌과 성찰적 분노…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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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우리 형법의 낮은 형량과 국민의 법 감정은 격렬하게 부딪혀왔다. 흉악범죄의 관대한 판결에 국민은 분노하지만 사법기관은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국민의 분노 또한 과녁을 찾지 못하고 산발하는 데 그쳐 둘 사이의 충돌은 현재인 동시에 확정된 미래인 듯하다. ‘조두순이 내년에 출소한다’는 문장이 발산하는 분노는 강력하지만 공허하다. 답을 끌어내지 못한 채 주어와 동사만 반복적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올해엔 고유정이고, 작년엔 이영학이었다.
분노가 수없이 반복되어 온 것에 비해 원론적인 대답은 고정되어 있다. 우리의 형사사법 제도는 족보상 일본을 거쳐 유럽에서 수입한 것인데, 유럽의 대륙법은 국민의 법감정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의 유럽은 마녀사냥과 공개처형의 광기가 주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 형법도 대륙법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이때 판사의 재량권은 약해지며, 악인의 처벌보다는 교화에 무게를 두게 된다.
사유의 추적만으로는 악인을 엄벌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법 불신의 정서는 여전히 고조된 채 오히려 대중문화계가 국민의 법감정에 영리하게 반응하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와 <돈 크라이 마미>, <공정사회> 등이 대표적인데 영화의 초점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찾아진다. 영화는 ‘가해자의 처벌이 곧 피해자의 보호이자 범죄의 예방이라는 결론’에 쉽게 다다르곤 한다. 허구적 서사이지만 흉악범들은 강력한 벌을 받게 되고 관객은 대리만족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국의 작가 앤서니 버지스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발표한 그의 책, <시계태엽 오렌지>는 악인을 엄벌하는 것에서 한 숟갈 더 떠, 악의 요소를 완전히 뿌리 뽑는 시도까지 이어진다. 9년 뒤 나온 동명의 영화 역시 소설과 비슷한 외양을 취하지만 핵심은 다르다. 영화의 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소설보다 성찰적인 질문을 던지며 결말을 맺는다. 소설이 엄벌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과 달리, 영화는 엄벌의 무용성과 모순의 당착에 주목한다.
기계적 엄벌과 인간의 가능성, 그 부조화
영화의 제목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시계태엽’은 기계와 문명, 엄벌을 상징하며 ‘오렌지’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둘 사이의 부조화는 한 칸의 띄어쓰기로 화해하지 못하고, 내포된 우주(space)의 간격과 같이 벌어져 있다. 광활한 모순 사이에서 영화는 ‘시계태엽’의 무용성을 포착한다. 사회의 필요로 ‘오렌지’를 ‘시계태엽’으로 개조했을 때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말콤 맥도웰 분)는 언론이 대서특필할만한 온전한 악인(惡人)이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최초의 양심조차 말살된 것처럼 악을 사랑한다. 그는 홈리스를 재미삼아 폭행하고, 패거리 싸움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범죄도 숱하게 저지른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 컷
강력범죄는 죄다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중에서도 알렉스의 성범죄에 무게를 둔다. 알렉스는 부부의 집에 침입하여 남편을 묶어놓고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그의 아내를 강간한다. 알렉스는 강간하면서 ‘Singing in the Rain’를 목청껏 부르는데 이 노래는 부부가 사랑에 빠졌을 때 불렀던 노래이면서 당대의 관객들 역시 낭만적인 상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당대의 관객들마저 절망에 빠트리는 동시에 현실과 영화는 중첩된다.
동료들의 배신으로 알렉스는 교도소에 갇히는데 그는 ‘루도비코’ 형을 받는다. 루도비코는 국가가 개발한 시범 형벌이다. 알렉스는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잔혹한 범죄가 득실대는 영화를 강제로 보게 된다. 치료를 거듭할수록 알렉스는 폭력이란 끔찍한 것이라고 세뇌받게 되고 이후의 그는 악행을 생각하기만 해도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앗아갔다는 점에서 치료가 아니라 개조가 맞고, 교화보다는 엄벌에 가깝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 컷
감독은 알렉스에게 처한 엄벌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알렉스는 결국 자살을 하고, 극적으로 살아나지만 정치적 수단이 된다. ‘루도비코’를 감행한 당국에 비판이 쇄도하자, 장관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알렉스를 선전의 도구로 쓴다. 알렉스는 잠깐의 향락을 누리지만 이는 행복이나 충족과는 거리가 멀며, 강요된 선은 불행이라는 결핍을 남긴다. 엄벌은 알렉스가 가진 내면의 악을 소거하지 못하고, 범죄의 재발 가능성 역시 일말도 닫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알렉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다. 엄벌이 범죄의 예방과는 무관하며 해결책은 아니라고 시사한다.
악인의 엄벌이라는 ‘감정’의 한계
감독의 통찰은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국민의 분노에 따른 엄벌주의는 성폭력 범죄자에 가장 맹렬하게 일어난다. 영화 역시 알렉스의 강력범죄 중 성범죄를 가장 비중 있게 다룬다. 성범죄자의 엄벌에 논의를 집약시킬 필요가 있어 보이는 가운데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의 논문 <성범죄를 엄벌하다>에서 엄격한 처벌은 인과응보일 뿐 범죄 예방에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추 교수는 ‘법 감정’이라는 단어부터 엄벌의 목적이 범죄 예방이 아니라 비당사자의 감정 충족에 있다고 지적한다. 법 감정이 우선 고려 대상이 되면서 ‘피해의 치명성’이 ‘센 처벌을 할 피해’와 ‘그렇지 않은 피해’를 선별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가해자의 엄벌이 강조되는 만큼 피해자를 검열하는 방식은 촘촘해진다. 성인여성보다는 어린아이로, 성희롱보다는 성폭행으로 더 자극적인 피해를 향해서만 관심이 집중된다. 정작 일상에서 범죄에 취약한 피해자는 논의에서 소외된다는 뜻이다.
엄벌주의는 또한 극악무도한 성범죄자를 ‘괴물’로 분류하면서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한다. 젠더의 맥락을 삭제하고 음주 등 일상의 방종으로 인한 특수한 경우로 만들면서 ‘완벽한 상황 통제’로 관점을 전개한다. CCTV 설치의 증대나 경찰의 순찰 강화 같은 일시적인 퍼포먼스가 최선의 대책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해결을 연기할 뿐이며 안전에 대한 일상의 강박을 심화한다.
관대한 형사사법 제도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판결이 편파적이고 중구난방이라는 국민의 법 감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흉악범죄면 무조건 엄벌해야 한다는 수많은 기사와 논문, 목소리는 의심해볼 만하다. 단순한 인과응보에서 나온 법 감정과 피해자의 보호와 범죄 예방에서 나온 목소리는 구별되어야 한다.
영화의 알렉스는 범죄를 저지르며 “나도 법은 안다고, 이 자식들아”라고 외쳤던 한편, 형벌을 받던 중에는 “전 단지 선해지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말한다. 전자의 발화는 엄벌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후자의 발화는 엄벌의 성찰을 가리킨다. 영화의 알렉스를 예외적인 괴물로 간주하고, 엄벌에 그치면 알렉스가 현실로 넘어온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결과다. 복수에 기인한 엄벌은 이미 실패했으며 이제는 큰 틀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이다. 유일한 방향은 피해자를 우선으로 고려한 성찰적인 분노와 그에 맞는 제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