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2.5모작, 마무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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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2.5모작, 마무리 이야기

2022. 12. 16 18:43 작성
정진섭 변호사의 썸네일 이미지
jsjung@soul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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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매년 반복되는 고시공부에 질려서 쓰게 된 '남극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석사학위 논문. 시험에 낙방하면 그나마 차선책이 될 것 같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 검사 임관 후에 그 덕을 크게 보았다. 해당 이미지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는 참고용 이미지. /셔터스톡

1. 해가 남쪽에서 뜨는 계절 / 남극의 추억

요즘 출근길에 하늘을 바라보면 남쪽에서 해가 뜬다. 다음 주면 낮의 길이가 제일 짧은 동지(冬至)가 되고, 이어서 크리스마스 지나면 2023년 새해가 열린다. 겨울 태생인 나에게 12월은 끝이라기보다 시작의 의미가 더 크다. 아내와 처음 만난 것도 40년 전 이맘때였고, 어느새 두 아들 모두 출가해서 각자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긴 세월이 그렇게 꿈처럼 흘러갔다.


흔히 겨울은 자기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기 알맞은 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글은 인생2.5모작 마무리 칼럼인 만큼, 젊은 법대생 시절 추억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 싶다.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다가 연달아 낙방하자 부득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매년 반복되는 고시공부에 질려서 술 마시며 방황하던 중, 국제법 전공하던 선배님의 권유로 '남극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 시절은 우리나라가 남극 세종기지를 세우기 훨씬 전이었다. 시험 낙방하면 그나마 차선책이 될 것 같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 검사 임관 후에 그 덕을 크게 보았다.


충북 영동지청 평검사로 근무할 때니까, 1986년 신년 벽두로 기억난다. MBC 대전방송국에서 느닷없이 인터뷰 요청이 왔다. 마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남극 탐사선을 보내는데, 국제법 전문가 인터뷰가 필요해서 수소문 끝에 연락했다고 한다. 짤막한 인터뷰였지만, 대전이 아니라 서울에서 직접 내려와 인터뷰를 하고 전국 방송에 나왔다. 그 TV 인터뷰 장면을 법무부 검찰국장님이 보시고 기특하게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 덕택에 나는 몇 달 후 검찰 인사에서 법무부 검찰국으로 발령받았다.


사실 나는 학연, 혈연, 지연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처지였는데, 오로지 직장에서 얻은 인연과 남극 논문 덕택에, 이후 법무부·대검찰청·서울지검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검찰 경력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인생2모작이라고 할 검찰 재직시절은 당초 기대한 것보다 훨씬 열정이 넘치고, 보람 가득한 시간이었다.


정진섭 변호사가 대학원 시절 쓴 '남극의 국제법적 지위' 석사학위 논문. /정진섭 변호사 제공


2. 책 버리기/ 너 자신을 알라

몇 주 전부터 서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주말마다 오래 간직하던 책장을 조금씩 비우고 있다. 전공서적은 10여년 전 모교 도서관에 일부 기증해서 책장 규모를 줄이기는 했지만, 출가한 두 아들 책까지 합하니 여전히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탐독했던 일본 소설 대망 20권과 로마인 이야기, 이문열 삼국지 등 연작물부터 빼냈다. 아깝긴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린 걸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낡은 책들을 버리다가 그냥 버리기 아까운 책도 눈에 띄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눈에 띄기에 뜬금없이 읽기 시작했다. 워낙 어릴 적에 건성으로 읽은 편이라 새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10대 청소년들의 번민과 마음의 세계를 간접적이나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나이 먹고 인생을 반추하는 느낌을 갖고 읽으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유명한 구절이 그저 평범하게 다가왔다. 꿈속의 새가 알을 깨고 나와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이미지화해서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유치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는 '참새의 자유'보다 '허공의 자유'가 더 근본적이고 소중하다는 '대자유'의 진리를 공유할 때가 된 것 같다.


요즘은 동영상 시대이니까 유튜브 검색으로 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찾아보았다. 과연 많은 강의 채널이 있었다. 인문학 강의하는 분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 굉장히 많다. 강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relationship)나, 삶에 대한 어떤 정의(definition),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how to live) 하는 자기 나름의 견해를 다양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들조차도 어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함이 없이, 그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살면 더 낫다, 저렇게 살면 더 좋다.'하는 갖가지 말들을 하고 있다.


사실 어느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 해도 존재의 목적이나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말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인 것은 오직 자기 자신한테 달려 있다. 깨어날 자가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 청년들을 상대로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모른다는 것만 안다.'고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크라테스는 그로 인해 신성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유혹해서 파탄으로 이끌게 했다는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 사회는 인간보다는 신(神)들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볼 때, 2500년전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지성적 통찰과 그것을 광장에서 설파한 용기는 불굴의 정신승리이자, 후세 인류에게 커다란 등불이 아닐 수 없다.


주말마다 오래 간직하던 책장을 조금씩 비우고 있다는 정진섭 변호사. /정진섭 변호사 제공


3. 부질없는 걱정/ 무명변호사의 일상

오래 살다 보니 부질없는 걱정을 하는 때가 많다.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더 잘되고, 지구촌을 밝게 만드는 데 좀 더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북한 핵 개발 소식이 들려오면 속이 상하고, 정치권의 부정부패나 진영대립이나 사회갈등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잠재해 있던 정의감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오지랖 넓게 지인들에게 내 개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얼마 전 사우디 왕자의 방한과 네옴시티 뉴스가 나올 때도 그랬다. 다들 신문방송에 1970년대처럼 중동 특수가 다시 온다고 들떠서, 정작 내게는 어떤 해결책도 없고, 그저 부질없는 걱정이긴 하지만, 자칫 복잡한 국제정세 하에서 중국정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국익 손실이나 입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다. 이런 생각의 습관들은 '지금의 나', 즉 내가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 여한을 내려놓지 못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금 내가 변호사 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재단법인을 상대로 2017년 임금 및 퇴직금 소송을 제기해서 2년 만에 승소 확정판결을 얻었고, 지금은 판결금 집행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원고는 2007년부터 한국에 정착한 75세 고령의 외국인 변호사이고, 피고 재단은 정부기관의 설립인가를 통해 출범한 명망 있는 공익재단 법인이다. 그런데 피고재단은 단지 법인 재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체불임금의 임의변제를 거부해서, 원고는 채무명의를 확보하고도 민사집행을 못 하는 상황이다. 법원의 확정판결문조차 무시하는 법인 대표자 부부의 준법정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사회 구성원들의 감시·감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운영 실태에 대해 사회고발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는 사이 승소판결 확정 이후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하튼 연내 채무명의에 대한 원리금 변제가 없다면, 내년에는 부득이 새로운 추가 소송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변호사로서 조정과 중재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존중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원만한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나는 5년 내내 그런 태도로 일관해 왔다. 하지만 피고재단의 반응은 한마디로 무관심과 냉랭함뿐이었다. 때로는 나의 부드러운 소송전략과 무기력함에 좌절감이 들 때도 있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우리가 올 한해도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나면, 우리들은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사랑하는 친한파 외국인이자 국제관계법에 능통한 원로 법학자 한 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며칠 전 법인 이사 가운데 한 분께 개인 면담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드렸다. 더 이상 나 혼자 속 썩여서는 문제해결이 안되겠다는 자기반성이 있었고, 마주 달리는 기차가 충돌하지 않도록 하려면,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려 8년이나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내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원고와 피고 모두 조정이나 중재에 매우 친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4. 인생 제3막 선언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플라톤 아카데미나 몇몇 유명한 인문학 강좌를 시청하다 보면, 인간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정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과연 어떤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정해진 결론이 있다는 뜻이지만, 자기자신의 본래적 정체성은 마치 우주와 같아서, 끝이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이 우주에 끝이 있다면, 우주의 무한다양성, 무한가능성, 무한창조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만일 우리가 육신과의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만을 나라고 여기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나, 즉 '존재하게 하는 나'를 '더 사실적인 나'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들은 자기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다양성, 무한가능성, 무한창조성 또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공부에 에필로그(끝)는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 소풍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마음공부는 필수과목이다. 사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관한 이야기는 석가모니의 가르침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진리이자,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누구든지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동안이라 할지라도 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부를 얻고, 명예를 얻고,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깨어나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깨어남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누림을 추구하는 삶은, 그 어떤 삶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죽음과 함께 반드시 깨어질 것이며, 그로 인해 삶은 단지 무의식이 그려내는 꿈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든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존재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의미와 이유는 존재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원인으로부터 비롯되어지며,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야말로, 육신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 인간정신과 보편진리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려는 궁극적 노력이며, 인생 제3막을 열기 시작한 '지금의 나', 즉 내가 앞으로 걸어갈 마음공부의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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