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교수 에세이 (10)] 26세에 얻은 고등학교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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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10)] 26세에 얻은 고등학교 졸업장

2020. 01. 21 11:52 작성
정형근 교수의 썸네일 이미지
hkjung@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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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8월 27일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가슴이 뿌듯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편집자 주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다. 19세가 되어서야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검찰 공무원이 됐다. 만학도로 법대 진학에 성공했지만, 그해 연탄가스 사고로 어머니와 형제를 잃는다.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는 중,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교수를 찾던 모교 경희대의 제안으로 로스쿨 교수가 됐다. 경희대 로스쿨 원장을 역임했고, 청탁금지법, 법조윤리 분야 전문가다.


종각 부근에 있는 고려학원으로 가서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최단기 6개월 반에 들어갔다. 중학교 졸업 후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가 그만두었던 것을 7년 만에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학원 수업은 퇴근 시간 전부터 시작했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서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왔다. 검찰청사를 총총걸음으로 나올 때는 왠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학원에는 여러 사정으로 고교를 졸업하지 못한 또래들이 많았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학원에 오는 이들의 손톱에는 시꺼먼 때가 끼어 있었다. 3년 고교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치려니까 수업의 진도는 매우 빨랐다.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많은 탈락자가 생겼다. 매달 첫날에는 낯익은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수학은 정말 어려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분수와 그래프를 배우면서 저걸 어디에 쓰나 싶어서 그때부터 수학을 포기했다. 대학 가는 데 수학 성적을 올려야 할 절박한 사정이라 열심히 했다. 학원은 밤 10시 30분 무렵에 끝났다. 집에 도착하면 자정에 가까웠다. 1982년부터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 금지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학원 수업이 늦은 시간에 마쳐도 여유롭게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어머니와 형님이 주무시는 단칸 셋방에서 불을 켜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당에 있는 평상에서 새벽 2시까지 책을 봤다. 그런데 전등 불빛이 집주인 할머니의 창문에 비쳐 잠을 잘 수가 어렵다는 불평을 들었다. 전구에 신문을 감아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지만, 밤늦게까지 불을 켜서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셋집에 사니까 공부도 편하게 할 수 없었다. 매일 새벽 6시에 청량리에 있는 대입학원에서 수학 단과반을 들었다. 학원 강사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면 정말 술술 풀렸지만, 정작 혼자 해보려고 하면 늘 막혔다. 새벽부터 밤까지 무리하다 보니 몸이 흐느적거렸다. 어머니는 주야로 공부하는 나의 체력보강을 위해서 매끼 조그만 양은냄비에 고기 찌개를 끓여 주었다. 같은 밥상에서 어머니, 형님과 달리 나 혼자만 고깃국을 먹는 것이 무척 미안했다.


대입학원의 새벽 강의를 듣고 출근 시간의 혼잡한 전철을 타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무실에서도 틈만 나면 책을 폈다. 직원들은 내가 고교졸업 자격을 얻고자 하는 것을 알고 격려해 주었다. 당시 과장님은 정년을 바로 앞둔 상태여서인지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그분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목에 살이 거의 없어 정말 목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항상 과장님은 나에게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재를 받으러 가면 "오늘 공부 다 했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 잘해주시니 업무처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했고, 사소한 민원도 발생하지 않도록 애썼다.


1982년 여름 어느 일요일에 국민대학교에서 검정고시를 보았다. 학원에서는 시험감독 선생들에게 드리라고 떡도 마련해 주었다. 시험 마친 후 채점을 해보니 붙을 거 같았다. 밝은 표정으로 출근을 하자, 직원들은 합격 기념으로 한턱내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래서 점심때 직원들을 모시고 가서 자장면을 대접하였다. 나보다 늦게 검찰에 입사한 후배들도 대졸이었는데, 나는 26세에 고교 졸업 자격을 얻을 것 같다는 이유로 축하연을 한 것이다. 축하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과장님은 정년퇴임을 하였다. 퇴임식이 열린 회의실에 그날 주인공인 과장님의 의자는 강단 아래에 놓여 있었다. 강단 위에는 검사장 혼자 앉았다. 엄격한 계급사회인 검찰조직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퇴임식이 끝나자 과장은 검사장의 승용차를 타고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검찰청을 떠났다. 이례적으로 검사장의 차로 배웅해 줌으로써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라고 했다. 퇴직하신 그분은 나에게 꿈을 찾아 솟구쳐 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준 분이었다. 나는 직원들 틈에서 서서히 청사를 벗어나는 차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과장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곧바로 입원을 한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 것이다. 베테랑 수사관으로 격무에 시달리면서 젊은 날 약주를 즐기시어 늘 투병 생활을 해 오신 분이셨다. 발인을 하는 날 직원들과 함께 문상을 갔다. 서대문구의 어느 동네 비탈이 매우 가파른 높은 위치에 있는 집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상가에 들어가니 방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운구를 하는 순간 과장의 노모인 듯한 할머니가 유달리 슬피 울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는 발인하는 순간이라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관을 대문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관이 바로 내 앞을 지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눈물이 울컥 솟았다. 당시 이종원 법무부 장관이 그곳까지 문상을 왔다. 장지로 향하려는 고인을 향하여 절을 하고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장관님은 "사람이 살았다고 할 것이 없구나!" 안타까워하시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종원 장관이 초임 검사 때 과장님은 입회 계장으로 인연을 맺은 후 계속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상가를 다녀온 후 나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달려오는 시내버스 바퀴 밑으로 순간적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멈칫 놀라기도 했다. 가슴 한편이 텅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늘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한 동안을 안타까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1982년 8월 27일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가슴이 뿌듯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나도 이제 고졸자가 되었다.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은 날 밤에 어머니에게 "내일 검찰청 사표를 내고 입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슨 돈으로 대학을 다닐 거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장학금 받는다는 말은 그냥 한 말이었고, 도저히 대학 갈 형편은 아니었다. 야간대학을 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퇴근 후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던 경험은 주경야독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했다. 더 이상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걷고 싶었다. 해가 뜨는 주간에 어엿하게 대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우리 가족이 결코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니, 조금만 참으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고 말씀드렸다. "늙은 어미가 자식 앞날을 어떻게 막겠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다가 개도 소도 안될까 봐 걱정이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어머니의 긴 한숨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출발을 할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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