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의식을 완전히 잃어야 겨우 인정받던 준강간, 그 기조 바꿀 대법원 판단 나왔다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단독] 의식을 완전히 잃어야 겨우 인정받던 준강간, 그 기조 바꿀 대법원 판단 나왔다

2021. 02. 15 21:48 작성2021. 02. 15 22:04 수정
박선우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sw.park@lawtalknews.co.kr

글자 크기 설정

미리보기

더 이상 어렵지 않은 법을 위한 인터넷 신문 로톡뉴스를 만나보세요. 법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무죄 나온 준강제추행 사건⋯대법원 "다시 판단하라"며 유죄 취지 파기환송

"피해자가 의식 잃지 않아도, 저항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다면 항거불능에 해당한다"

그동안 준강간, 준강제추행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태가 블랙아웃을 넘어선 패싱아웃(passing out⋅의식상실) 상태임을 입증해야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의식도 없었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해야 가해자는 처벌됐다. 하지만 이런 기조를 깬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셔터스톡⋅편집 및 그래픽=조소혜 디자이너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밤. 원치 않는 성추행을 당했다. 직전까지 남자친구와 노래방에 있다가 화장실에 간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그 남자를 성추행으로 고소했지만 이 사건의 2심 법원은 "준강제추행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피해 여성의 발걸음이 비틀거리지 않았고, 남자가 부축하지 않아도 모텔 계단을 올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니, 정신을 잃은 건 아니다"고 판단했다. 정신은 있되 기억만 나지 않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블랙아웃(black out). 이 상태가 인정되면 범죄를 당했다는 증거가 명백해도 가해자는 처벌을 피한다.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지 동의했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준강간, 준강제추행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태가 블랙아웃을 넘어선 패싱아웃(passing out⋅의식상실) 상태임을 입증해야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의식도 없었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해야 가해자는 처벌됐다.


그런데 문제는 패싱아웃을 인정받는 게 상당히 까다롭다는 데 있었다. 위 사례처럼 제 발로 걷거나, 똑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 증거가 나오면 '백이면 백' 패싱아웃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준강간⋅준강제추행 혐의는 무죄였다.


"패싱아웃=유죄, 블랫아웃=무죄" 법칙 깬 민유숙 대법관의 판결

이런 관행에 민유숙 대법관이 철퇴를 내렸다. 술에 취해 의식이 희미한 그 상태를 "패싱아웃이냐 블랫아웃이냐"로 양분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 제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은 피해자가 패싱아웃(의식상실) 상태가 아니더라도 준강제추행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를 깬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알코올의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에 맞서려는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다면 의식이 있더라도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픽=조소혜 디자이너
이번 대법원 판결은 알코올의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에 맞서려는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다면 의식이 있더라도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픽=조소혜 디자이너


민 대법관은 "의식상실 상태에 빠져있진 않지만 알코올의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에 맞서려는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다면 '항거불능'에 해당한다"며 "이러한 피해자에 대한 성적 행위 역시 준강간죄 또는 준강제추행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패싱아웃이 아니라고 무조건 준강간⋅준강제추행 사건에 무죄를 내려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의식상실까지 가지 않았어도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강간⋅강제추행이 발생하면 가해자를 준강간⋅준강제추행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단편적인 모습으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판단해서 안 된다

원래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경찰에게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고, 스스로 걸었다는 점을 근거로 "스스로 행동한 부분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준강제추행이 아니다"로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민유숙 대법관은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생면부지)와 연령 차이(10살 차이), 만난 상황(건물 화장실 앞에서 막 만난 사이)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정에 비춰보면)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며 "피해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이유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면, 피해자가 성적인 접촉에 동의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선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당시 상황 기억 못 한다는 이유로 성관계 동의 가능성을 가정하는 건 잘못됐다"

종전 대법원은 술에 취한 여성이 스스로 걷는 등 모습이 담긴 CCTV 장면이 있다면, 심신상실(또는 항거불능)을 전제로 하는 준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성범죄 피고인들이 소송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번 사건 2심 재판부도 "피해자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행동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성관계에 응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결문에(서울고등법원 2014노3517) 적었다. 이번에도 피고인의 "동의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주장이 먹혔던 것이다.


하지만 민유숙 대법관은 이런 종전 판결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블랙아웃이 발생하여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피해자가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이를 합리적 의심의 근거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만 모르는 일상 법률 상식, 매일 아침 배달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