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 책임 공방, 계약서 '한 줄'로 갈린 원청과 하청의 운명
수천억 책임 공방, 계약서 '한 줄'로 갈린 원청과 하청의 운명
원자력발전소 화재 손해배상 소송
법원, 하청 책임 20% 인정, 원청은 '간접 손해' 면책 판결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원자력발전소 부품 교체 중 발생한 화재 사고로 수천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법원이 시공을 담당한 하도급 업체에는 상당한 책임을 인정했지만, 원청 업체에게는 계약서의 특정 조항을 근거로 대부분의 배상 책임을 면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사고는 A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한빛 1호기에서 발생했다. A는 피고 C와 원자로 냉각재 펌프(RCP) 전동기 부품 교체 계약을 맺었고, C는 설치 작업을 피고 E 주식회사에 하도급했다. 2019년 1월, E의 직원들이 RCP 전동기 조립 과정에서 배관 체결을 소홀히 해 윤활유가 대량으로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E와 A의 직원들이 함께 청소했지만, 미세한 틈새로 흘러들어 간 윤활유가 남아 있었다. 두 달 뒤, 발전기 재가동을 위해 배관에 열이 가해지자 보온재에 스며든 윤활유가 발화하며 화재로 이어졌다.
이 사고로 발전소 재가동이 55일 지연되면서 A는 막대한 매출 손실과 각종 고정 비용 등 수천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E와 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청업체 E의 책임 누유와 미흡한 청소의 과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각 회사의 책임 범위였다. A는 E에 대해 사고를 일으킨 직원들의 사용자로서 불법행위 책임을, C에 대해서는 하청업체인 E의 행위에 대한 채무불이행 책임을 물었다.
법원은 E의 직원들에게 두 가지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첫째, 배관 조립을 소홀히 해 누유 사고를 일으킨 점이다.
둘째, 윤활유가 고온에서 화재를 유발할 수 있음을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청소 작업을 미흡하게 해 화재를 발생시킨 점이다.
이에 따라 법원은 E가 A에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법원은 A의 일부 과실도 인정해 E의 책임을 20%로 제한했다.
누유를 막는 장치에 미세한 틈이 있었고, 누유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A 소속 직원이 함께 감독했다는 점 등이 참작됐다.
원청업체 C의 책임 '결과적 손해'는 책임지지 않는다
진정한 판결의 반전은 C의 배상 책임에서 드러났다.
법원은 C와 맺은 도급계약서에 "C는 고의나 중과실이 아닌 한, 결과적 또는 간접적 손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법원은 이 조항을 근거로 A가 주장한 막대한 손해액 중 화재로 인해 직접적으로 훼손된 보온재 교체 비용(약 5,200만 원)만을 '직접적 손해'로 인정했다.
반면, 한빛 1호기의 가동 정지로 발생한 매출 손실, 인건비, 전력 구매 비용 등은 '간접적 또는 결과적 손해'에 해당한다며 C의 배상 책임에서 제외했다.
결론적으로 법원은 A가 청구한 금액 중 C에게는 보온재 교체 비용의 절반인 약 2,600만 원만을 E와 공동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E의 최종 배상액은 A가 청구한 5억 원을 모두 배상하게 되었으며, 이는 A가 주장한 전체 손해액 중 일부만을 청구했기 때문에 법원이 E의 책임 비율(20%)을 적용한 결과와 우연히 일치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대규모 산업 계약에서 책임 소재를 규정하는 계약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원청과 하청 간 복잡하게 얽힌 책임 관계와 함께, 계약상 명시된 책임 제한 조항이 사고 발생 시 당사자들의 운명을 어떻게 가르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